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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2월14일 오후 4시. 중앙공보관 화랑. 젊은 작가 10여명이 최붕현의 ‘연통’이라는 작품 가운데 의자에 앉아 비닐우산을 쓴 김영자 주위를 돌면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른다. 이들은 우산에 촛불을 꽂고, 김영자가 일어서서 함께 원을 그리며 돌다가 다시 앉으면 모두 달려들어 촛불을 끈다. 그러더니 우산을 찢으며 휴지와 새끼줄로 감다가 짓밟았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행위미술 ‘비닐 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다. 한 신문은 “첫눈에 괴상한 미술이라는 인상”이라고 썼다.

행위미술이 이 땅에 들어온 지 꼭 40년. 여느 미술이 행위와 더불어 생성되는 것과 반대로 행위미술은 행위의 순간 사라지는 특성을 지닌다. 다만 흔적이 남을 뿐.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전시회에는 당시의 신문보도 스크랩과 사진들과 행위의 찌꺼기와 행위도구 등을 전시한다. 시간이 뒤로 갈수록 빛바랜 정도가 덜해지고 근작은 비디오로 보여주어 행위미술 40년을 통사적으로 훑어볼 수 있다.

1968년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이 부패한 ‘국전’을 비판한 ‘한강변의 타살’을 연출하는 등 70년대 초까지 활발하게 전개되던 행위미술은 10월 유신을 전후로 ‘퇴폐’ ‘불온’으로 간주돼 급속히 와해됐다. 몇몇 경우를 빼고는 저항적 비판의 경향을 떠나 미술 내적인 개념과 논리를 다루는 쪽으로 돌아섰다. 1970년 김구림, 정한승, 방태수 등 세 명의 예술가들의 이색 해프닝을 보자. “피임구 끼고 이것도 예술, 육교에 풍선 띄워놓고 “무한예술”, 행인들에게 나눠준 ‘작품’마저도 콘돔, “매좀 맞아야겠다” 부정적 반응도”. 당시 이들이 서울대 문리대 앞과 신세계백화점에서 벌인 퍼포먼스를 보도한 주간지의 제목들이다. 이처럼 행위미술은 괴상한 인물들의 해프닝으로 인식됐으며 작가들 역시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70년대 초중반과 1980년대 초중반은 공백기. 80년대는 무용과 음악, 미술의 결합, 또는 마임과 음악의 결합 등 장르의 크로스오버와 퓨전형상이 두드러졌다. 제의성도 두드러진 특징. 무세중, 김용문, 김영화 등의 작업에서 민중적 한풀이가 엿보였다.

80년대의 압권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89청년작가전>. 안치인, 윤진섭, 이두한, 이불 등이 전시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두한은 알몸을 석고로 뜬 뒤 국부에 경광등을 대고 돌아다니고, 윤진섭은 대형 유리창에 계란 180개를 던져댔다. 이불은 짐승같은 봉제옷 차림으로 배회하고 안치인은 요란한 음악에 맞춰 수백장의 카드를 뿌렸다.

90년대 이후 행위미술은 마당놀이나 대동제와 같은 축제에 편입되면서 직접소통의 도구가 되었다. 또 조셉 보이스를 위한 굿을 펼쳤던 백남준을 비롯해 모든 미술가들이 자신들의 창작행위를 비디오로 기록하고 나아가 이를 반복적으로 수정 편집하여 대형 스크린에 투사하는 방식의 작품으로 나아가게 된다.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반복해 보여줄 수 있게 된 것.

최근 들어서는 작가에 국한하지 않고 불특정 다수로 번지는 경향마저 보인다. 특정장소와 시간에 모여 놀이처럼 행해지는 ‘플래시 몹’, 인터넷을 통해 무한복제되어 유포되는 유시시(손수제작물) 등이 그것이다.

2007년 8월 26일. 오후 6시. 과천 현대미술관. 전시장 입구에서 70년대 왕성하게 활동했던 원로작가 이승택(76)씨가 지구를 상징하는 대형풍선을 굴리면서 돌아다니고 신기해하는 아이들이 따라다니면서 풍선을 밀고 다녔다.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던 관객들은 ‘지구행위’가 끝나자 박수를 쳤다. 9월15일에는 팝 아티스트 낸시 랭의 ‘미술관 속 동물원’이란 퍼포먼스가 있다.

 

행위미술 40년 왁자한 흔적

한겨레  2007.08.26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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