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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강국진은 주변인의 삶을 살다간 작가다. 여기선 그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술가에게 금과옥조와 같은 ‘창조성’을 화폭에 펼치고자 부단히 노력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끊임없는 자기 시도를 통해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가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했다.
그가 한국 화단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대 중반 논꼴 동인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당시 강국진은 기성 화단의 풍토에 안주하기보다는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주류에 머물러 받게 될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보다 경계인으로의 삶이 그에겐 더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로캉탱,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그는 오래된 관습과 타협하지 않은 채 스스로 외톨이로 남길 원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는 이유다.
강국진의 작품 경향은 크게 △1960년대 중반 논꼴과 신전, 청년작가연립전 활동을 통해 펼친 행위예술과 매체 실험 작업 △1970년대 다양한 오브제 작업 △1980년대 선조작업 △운명하기 직전까지 선조와 전통 소재를 조화한 전혀 새로운 개념의 작업으로 구분된다. 말년에 그는 예술계 인사들과 함께 한국 문화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기도 했었다.
강국진이 한국 화단에 끼친 영향은 상당히 크다. 그가 네온과 스테인리스 스틸을 이용해 만든 실험 작품 ‘시각의 즐거움(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국내 최초의 테크노 아트로 불리고 있으며 그가 시도한 판화 작품은 ‘한국적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현대미술 최초의 행위예술가이자 최초의 판화 공방 운영자, 최초의 집단 창작 스튜디오 개념을 구현한 작가로 평가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1975년 판화 개인전을 열어 당시 비주류였던 판화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후 강국진은 판화 공방을 열어 후학들을 교육하는 일에도 열중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화단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판화가 빠르게 주류 미술계로 파고들었으며 우리 미술 문화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화단이 단색조 회화와 백색주의라는 덫에 빠져 허덕일 때도 강국진은 스스로의 한계를 떨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이러한 한계가 서구 미술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에서 비롯됐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에 맞는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생각은 이후 그의 작품에 중요한 위치를 담당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그는 회화의 한국화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당시 서구 미술계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대비하는 뉴페인팅 회화가 강세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강국진의 예술 혼은 빛을 발했다. 그는 이질적인 면만을 강조하던 기존 미술 화풍의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혀 다른 소재를 사용하되 대조보다는 조화, 대결보다는 공존을 작품 속에서 형상화했다. 한편으로 석굴암의 본존불, 부적에 등장하는 독수리, 기마인물상, 색동 등과 같이 한국적인 소재를 사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추상적인 표현이 강조된 드로잉이나 선묘를 사용해 절묘한 하모니를 연출했다.
점 가락 87-3 무제1
환경비지니스 2007.07.13
강국진의 미학세계 - 활화산같은 자유가 '넘실' 영원한 주변인
KUKJIN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