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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강국진(1939-1992)의 작품세계 중 입체와 행위예술에 초점을 맞춰 쓴 것이다. 알다시피 강국진은 입체를 비롯하여 설치, 행위예술, 판화, 회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작업을 펼친 작가다. 그러나 작업 초기에 행위예술을 시도했던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듯이, 강국진 또한 작업의 전 과정을 살펴볼 때 입체와 행위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특히 해프닝과 관련시켜 보자면, ‘청년작가연립전’(1967.12.11-16)에 참여했던 시기부터 <한강변의 타살>이란 해프닝이 있었던 1968년까지 약 2년간에 걸쳐 전개되어 미진한 감이 없지 않다. 강국진의 작품이 집대성된 화집(1995)의 연보에는 그가 참여했던 해프닝이 모두 4개 기록돼 있는데, 이를 근거로 해프닝의 목록을 여기에 옮기면 다음과 같다.

1967.12.14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중앙공보관 화랑, 서울)
1968.6.2     색 비닐의 향연(서울)
1968.6.30    투명풍선과 누드(세시봉 음악감상실, 서울)
             화투놀이(세시봉 음악감상실, 서울)
1968.10.17   한강변의 타살(제2한강교 밑, 서울)

이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색 비닐의 향연과>, <화투놀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우리미술 100년』에도 나오는데1, 수 선생은 이 기술에 관한 필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강국진 화집을 근거로 기술했다고 말했다. 강국진 화집의 연보에는 명제만 명기돼 있다.
작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기술이나 기타 사진 자료 등은 찾을 수 없다. 나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 당시 해프닝을 주도했던 정강자 선생과 전화로 인터뷰를 했는데, 그녀 역시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이번 강국진 회고전을 위한 학술세미나에서 이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사실이 밝혀지길 기대한다.
강국진의 오브제 작업에 관해서 언급하자면, 최초의 오브제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는 <꾸밈(Display)>(1967)2 이후 첫 개인전(명동화랑, 1973)에 오브제 작품들이 대거 출품되었다. 이 작품들은 나무, 밧줄, 새끼줄, 비닐, 모래, 골판지, 닥종이, 천 등을 사용한 것으로 여기에는 <형의 상관>이란 일관된 명제가 붙어있다. 강국진 화집에는 총 14점의 입체, 설치작품이 수록돼 있는데, 이를 토대로 강국진의 오브제 작품에 관해 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2. 오브제, <시각의 즐거움>과 내면적 나르시즘
강국진은 ‘논꼴’멤버로 화단 활동을 시작했다. ‘논꼴’이란 명칭은 무악재 너머에 있던 홍제동 근처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인 강국진, 김인환, 남영희, 양철모, 정찬승, 최태신, 한영섭 등이 모여 결성한 이 그룹은 실험적인 성격을 표방하였다. 이들은 한국 현대미술사상 최초의 동인지 격인 『논꼴아트』(1965)를 펴냈는데, 이는 당시의 열악한 화단 사정을 감안할 때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논꼴’은 비록 단명하긴 하였으나3 선언문과 자체의 기관지를 발행하였다는 점에서 전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논꼴아트』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일체의 타협과 형식을 벗어나는 시점에서 우리는 항시 자유로운 조형의 기치를 올린다.

1.        새 시대에 참여하는 ‘자유에의 의식’을 우리의 조형조건으로 한다.
2.        우리는 극단적인 시간의 창조적 변화를 조형의 윤리로 삼는다.
3.        기성의 무분별한 감성에서 벗어나 지성의 발판에서 형성의 모랄을 추구한다.4

비록 선언문을 통해 ‘자유에의 의식’과 ‘창조적 변화’를 조형의 윤리로 표방하기는 했으나, 오래지 않아 ‘신전’이 독립한 것으로 미루어 조직이 그리 견고했던 것 같지는 않다. 강국진, 김인환, 정찬승 등 기존의 멤버에 심선희, 양덕수, 정강자 등이 가세, ‘신전’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훗날 ‘무’, ‘오리진’그룹과 함께 ‘청년작가연립전’에 참가하게 된다.
여기서 ‘논꼴’ 동인이 결성되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강국진의 오브제 작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싶다. 『논꼴아트』에는 ‘결산과 창조의 기점에서’라는 미술평론가 유준상의 글이 실려 있는데, 그는 이 무렵 홍제동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논꼴’은 무악재 고개 너머에 있었다. 이른바 변두리였던 이 곳 지도도 많이 달라졌는데 허수룩한 이층 가옥의 이층을 빌려서 그들의 ‘아뜨리에’로 쓰고 있었다. 집이 서기 전에 그 곳에 논이 있었고 고랑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그 곳을 ‘논꼴’이라 불렀다는 것이 젊은 그룹의 명칭의 유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직 제작중인 백호 크기만큼의 캔버스들이 즐비한 가운데서 ‘논꼴’ 일곱 사람과 ‘쟈곱센’(Jacobsen)의 작품 같은 난로(역시 그들이 두들겨 만든 것이었다)를 끼고 둘러앉아 막걸리를 주고받았다.5”

이 글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당시 ‘논꼴’ 동인들은 캔버스 작업을 하고 있었다. 미술사가인 김미경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에서 최초로 완전한 오브제 작품이 출현한 것은 제로 그룹(Zero Group)이란 이름을 내건 ‘무’ 동인6 의 두 번째 전시회에 이르러서였다고 한다. ‘현대미술실험전’이란 타이틀을 표방한 제2회(1967.6.20-26) ‘무’ 동인전에 폐물, 수술용 응급 의료기구, 깨진 그릇, 고무주머니, 고무장갑, 해골 마스크, 헌 구두짝, 방독면, 우주복 등이 등장했던 것이다.7
‘논꼴’ 전시회에 앵포르멜 풍의 유화작품을 출품한 바 있는 강국진이 처음으로 오브제 작품을 선보인 것은 ‘청년작가연립전’에서였다. <꾸밈(Display)>(1967)이란 오브제 작품을 출품한 것이다.8 책상 위에 무색의 투명한 빈 주사약 병들을 직렬로 쌓거나 흐트러뜨린 이 설치작품은 짐작컨대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몇 가지 다른 작품을 만들어낸 것 같다.9
이 작품은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내의 화장대 위에 놓인 화장품을 가지고 놀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투명한 유리병의 빛이 거울에 반사되도록 고안된 것이다. 거울에 비친 작가 자신의 얼굴과 빛의 이미지가 겹쳐 마치 작가의 나르시스적인 내면세계를 보는 것 같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거울을 비추며 노는 장면이 나온다.10
생전의 강국진은 유독 말이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는데, 이는 화단의 선배로 존경하며 교분을 나눴던 나의 경험이나 그와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과 일치한다. 흔히 말이 없이 과묵한 사람들은 자의식이 강하다는 속설이 있는데, 강국진의 경우도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내 작품의 대상은 무한한 내재적 심경에서부터 출발하여 이것을 대상화한다. 감정은 내면적 필연의 욕구적 소산이다. 이 감정은 나의 특유한 생활에서 온 체념이다.” – 작가의 변11

당시 강국진은 생계를 위해 인테리어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었는데,12  재료의 사용이나 발상의 면에서 볼 때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가령, <꾸밈(Display)>이라는 명제가 그렇고, <시각의 즐거움>이 자의식의 표출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13
“아내의 화장대를 비쳐 가지각색 병들이 아롱이 지면서 찬란하게 빛나고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시없는 내 오락이다.”라는 이상 소설의 단편 중에서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시없는 내 오락” 즉, ‘시각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강국진의 이 작품에서 거울에 비친 작가 자신의 모습이 등장한다거나, 거울로 만든 작품 속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장면이 실린 도판은 이와 관련시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고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강국진의 오브제 작품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어렵다. 다만 화집에 기술된 연보로 미루어 볼 때, <시각의 즐거움>을 발표 한 1967년부터 제1회 개인전을 열었던 1973년까지 오브제 작품을 발표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강국진의 전 생애에 있어서 오브제 작품을 발표한 것은 약 7년간이며, 그것도 김구림, 정찬승 등과 함께 마포구 합정동의 판화공방에서 판화작업을 하기 시작한 1971년과 겹쳐있다. 또한 이 시기는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 있었던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한강변의 타살>에 이르는 서너 차례의 해프닝 발표와 겹쳐 있기도 하다.
1973년은 강국진의 오브제와 관련된 실험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때 그는 <형의 상관>이란 일관된 명제로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 형의 상관>연작은 서로 이질적인 재료들이 결합할 때 드러나는 물질의 양태에 대한 문제를 탐구한 것이다. 내면적 심리상황을 유리병이나 거울과 같은 오브제에 투영했던 초기작과는 매우 다른 성격의 작품이다. 이 무렵의 작품에는 논리적 사고의 흔적이 투사돼 있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70년대 초반의 상황은 ‘A.G’(1969)와 ‘S.T’의 결성(1971)으로 대변되는 아방가르드의 확산과 맞물려 있었다. 이태리의 아르테 포베라와 미국의 개념미술, 그리고 이를 직수입하여 ‘모노하(物派)’라는 독자적 모드를 만들어낸 일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강국진의 오브제 작품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그 영향이 읽혀진다. 한지 위에 놓인 직육면체의 나무, 직육면체의 오브제에 놓인 한 다발의 새끼줄, 직육면체의 나무에 천을 덮고 로프로 촘촘히 감은 작품 등등은 당시 유행했던 동료 작가들의 작품과 유사한 발상과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비닐봉지에 모래를 가득 담은 뒤 이를 구부려 터진 곳으로 모래가 삐져나오게 한 설치 작품은 힘의 역학관계를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당시 ‘관계항’에 대한 개념적 접근을 꾀한 작품이 많다는 점에서 볼 때 뚜렷한 독창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내가 기획한 ‘공간의 반란-한국의 입체, 설치, 퍼포먼스 1967-1995’전에 출품된 강국진의 네온을 이용한 입체작품(1974?)은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작품이 아닌가 한다. 노랑, 빨강, 파랑, 흰색의 네온으로 이루어진 높이 약 2.5미터 정도의 긴 입방체인 작품은 간결한 구조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강국진의 오브제 작품 가운데 훗날 선묘작업과 연관되는 것은 골판지와 한지를 이용한 작품이다. 그는 골판지를 이용하여 다양한 구성작업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가로 줄과 세로 줄이 대비를 이루는 조형어법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골판지의 일정하며 기계적인 리듬과 한지의 구불구불한 곡선적 리듬을 대비시킨 작품 <형의 상관>(1974)은 같은 해에 시작되는 선 작업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다.

3. 해프닝-사회에의 반항과 인습에의 거부
강국진의 경우, 오브제나 설치작품 보다는 해프닝이 더 큰 미술사적 비중을 갖는다. 해프닝의 경우에 그는 정강자, 정찬승, 김구림 등과 함께 선구자적 위치에 있다. 그가 한국 행위예술의 선구자로서 추앙을 받는 것은 당시 그가 보여주었던 동시대의 문화적 폐습에 대한 비판과 반항의 정신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가 생전에 발표한 해프닝은 서너 편에 지니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백미는 <한강변의 타살>이다. 1968년 10월 17일 오후 4시 제2 한강교 밑에서 벌어진 이 해프닝에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은 기성의 문화에 대한 거부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당시 이들이 주장한 매니페스토는 다음과 같았다.14

1. 문화 사기꾼(사이비 작가)
2. 문화 실명자(문명공포증 환자)
3. 문화기피자(관념론자인 19세기적 현대인)
4. 문화 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5. 문화 곡예사(사실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사실로 왔다 갔다 하는 시대 미학의 편승자)
6. 문화 보따리 장수(정치 작가)

다시 말해 당시 한국의 문화를 좀먹는 사이비 문화인에 대한 고발을 통해 이들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자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해프닝에서 행위자들은 구덩이를 판 다음 색 비닐을 몸에 감은 뒤 구덩이에 묻혔다. 보조 행위자들이 이들에게 양동이에 걸친 비닐 천 위에 위에 열거한 내용을 적은 뒤, 그것을 읽으면서 모아 태우는 화형식을 하고 이를 매장하는 행위를 벌였다.15
강국진은 이보다 앞선 1967년 12월 11일 밤 10시부터 시작된 ‘청년작가연립전’을 위한 가두시위에서 ‘신전’, ’무’, ’오리진’ 동인들과 함께 당시 국전의 폐해와 문화적 병폐를 고발하는 과격한 행동을 보여준 바 있다. 국내 최초의 문화적 데먼스트레이션인 이 시위에서 그는 양손에 ‘행동하는 화가’, ‘좌상파 국전’이란 문구가 쓰인 피켓을 들었다. ‘생활 속의 작품’, ‘추상 이후의 작품’ 등 미술에 관련된 문구에서부터 ‘국가발전은 예술의 진흥책에서’, ‘현대미술관 없는 한국’, ‘4억의 도박 국립종합박물관’ 등 문화정책에 이르기까지 미술과 문화행정의 개선을 촉구하는 이들의 시위는 사회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16
일부 회원들이 경찰서에 연행되는 사태까지 야기한 이 날의 시위는 사회에 대한 앙가쥬망(현실참여)의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행동으로서의 미술’, 또는 ‘정치적 아방가르드’로서의 행동예술이라는 최초의 선례를 남겼다.17
이 두 개의 해프닝 참여에서 볼 수 있듯이, 강국진은 미술활동의 초기에 ‘문화테러리스트’ 내지는 ‘문화 게릴라’적 성격을 드러냈다. 그러나 훗날 ‘제4집단’에 의해 행해진 여러 차례의 문화 테러적 성격의 퍼포먼스에 그는 가담하지 않았다. 이는 초기 해프닝의 동료였던 정찬승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장기간 동안 다양한 행위예술을 보여준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다. 강국진 화집의 연보에는 1970년 한 해의 활동이 공백으로 남아있는데, 1971년에 판화공방을 연 일을 감안한다면, 행위예술을 떠나 판화와 입체 쪽으로 선회하던 중이 아니었는가 짐작된다.

4. 나오는 말
강국진은 작업의 초기에 전방위적 성격의 작가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해프닝을 비롯하여 입체, 설치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는 5.16 군사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한편으로는 경제 개발에 주력하여 산업입국으로의 발판을 다진 반면, 사회적으로는 억압과 더불어 각종 인권의 탄압이 자행되던, 실로 음양이 교차된 기간이었다. 유신헌법으로 대변되는 군정의 시대에는 문화예술에 대한 초법적 탄압이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었다. 이유를 불문한 연행과 구금, 고문이 많은 예술인들을 괴롭혔다. 그 과정에서 의식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뜻을 굽혔다. 저항의 정신은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비판적 정신이 투철하지 못했던 예술가들은 점차 ‘개념의 유희’쪽으로 선회했다. 아마 강국진은 후자가 아니었을까. 그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 발언을 그치고 70년대 초반에 해당하는 3년간을 오브제와 판화에 몰두하다 1974년부터는 평면작업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그 이후 작고할 때까지 18년간의 세월을 판화와 평면작업으로 보냈으니, 입체와 행위예술은 초기의 실험에 그치고 만 아쉬움을 남겼다. 바로 이점이 내가 그를 ‘영원한 실험예술가’ 혹은 ‘영원한 아방가르디스트’로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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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미술 100년』, 오광수, 서성록 공저, 현암사, 2001, 262쪽 참조.
“’청년작가연립전’은 한 번으로 끝났으나 ‘무’ 동인과 ‘신전’ 동인들이 중심이 된 청년작가연합회는 현대 미술에 관한 세미나와 수차례에 걸친 해프닝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중략…… 특히 이들이 행한 해프닝은 시위성과 연극성을 동시에 띠어 일반의 관심을 끌었다. <화투놀이>, <색 비닐의 향연>을 거쳐 ‘환경미술의 공동 현실’이란 주제의 세미나와 동시에 열린 <투명풍선과 누드>에 이르면서 절정에 온 느낌을 주었다.” 오광수 선생은 이 기술에 관한 필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강국진 화집을 근거로 기술했다고 말했다. 강국진 화집의 연보에는 명제만 명기돼 있다.
2 『‘청년작가연립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빈 주사약 병을 수십 개 쌓아놓은 설치작품임.
3 ‘논꼴’ 동인들은 한 차례의 동인지 발간과 창립전(1965.2.8-14, 신문회관 1, 2 전시장)을 포함, 두 차례의 전시회를 갖고 해체되었다.
4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98쪽에서 재인용.
5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Ⅰ – 6, 70년대 미술운동의 자료집』, ICAS, Vol. 1, 47-8쪽에서 재인용.
6 홍익대학교 회화과 출신들로 이루어진 전위 그룹. 김영남, 김영자, 문복철, 석난희, 이태현, 최붕현, 황일지 등과 당시 유일하게 서울대학교 회화과 출신으로 후에 김상영, 그리고 건축과 출신인 설영조 등이 모여 1962년에 결성한 단체다.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시공사, 2003, 39쪽.
7 김미경, 앞의 책, 31쪽 참조.
8 투명한 빈 주사약 병을 수십 개 모아놓은 이 작품이 <시각의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는 것도 있는데(김미경, 앞의 책 62쪽), 작품의 내용을 살펴볼 때 서로 다른 작품임이 확실하다.
9 그러나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나는 이 작품이 동일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강국진 화집에는 이 작품의 명제가 <꾸밈, 시각의 즐거움, 오늘의 시각, 바로 오늘>로 돼 있다. 그러니까 다른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다른 각도에서 찍은 명제가 서로 다른 작품의 사진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10 아내가 외출만 하면 나는 얼른 아랫방으로 와서 그 동쪽으로 난 들창을 열어 놓고 열어놓으면 들이비치는 볕살이 아내의 화장대를 비쳐 가지각색 병들이 아롱이 지면서 찬란하게 빛나고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시 없는 내 오락이다……이 장난이 싫증이 나면 나는 또 아내의 손잡이 거울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논다. 거울이란 제 얼굴을 비칠 때만 실용적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도무지 장난감인 것이다.
이상, 『날개』, 이상전집, 임종국 편, 문성사, 1972, 17-18쪽 참조.
11 나의 작품 속의 말, 강국진,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67-68쪽에서 재인용. 행갈이 필자.
12 강국진 발자취, 강국진 화집, 300쪽,
“명동에다 박종무와 ‘스페이스 디자이너(Space Designer)’라는 일터를 마련하여 찻집, 카페의 안 꾸미기(실내장식), 유리차림(쇼윈도우) 따위를 두루 맡아 네 해 동안 하다가 ‘명동시절’을 마감하고 합정동으로 옮김.”
1967년도에 발표한 작품 가운데 <형의 상관>은 천, 비닐, 색띠 등을 사용하여 형과 재료와의 관계를 다룬 것이 있는데, 이 작품은 같은 명제인 1973년 <형의 상관> 연작의 초기적 발상을 보여주고 있다.
13 강국진 화집, 252쪽 사진 참조.
14 정강자, 『꿈이여 환상이여 도전이여』, 소담출판사, 50쪽, 단 6항은 필자가 추가.
15 정찬승, ‘한국의 해프닝’, 홍대학보, 1969. 12. 1, 김미경, 앞의 책 94쪽 내용을 요약 정리.
16 윤진섭, 앞의 책, 85-86쪽.
17 윤진섭, 앞의 책, 86쪽.

강국진의 오브제와 해프닝의 비평적 의의

미술평단 2007. 여름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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