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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문화에 최초의 반란을 시도한 뒤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오늘도 성업중인 해방둥이 세대들. 최인호 조영남 김민기 윤형주 송창식 양희은 전유성 김세환 이장희 김구림 등. 통기타와 당당한 대중소설, 그리고 해프닝으로 개발연대의 에너지를 노래, 문학, 미술로 끌어들이고 서양을 참고하되 우리 것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사람들. 그들은 오늘의 청년문화를 '아이돌 문화'라고 걱정하면서한 한 세대 전의 끈끈, 겸손, 소박했던 풍토를 그리워한다.

해방동이들이 만든 문화
지난 4월 9일 저녁 7시 30분.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한국 포크음악 30주년을 기념하는「99 포크 페스티벌」이 열렸다. 때이른 장마라도 시작된 듯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밤이었다. 이 비를 뚫고 뒷전에 밀쳐져 있다고 생각되는 포크음악을 들으러 과연 몇 사람이나 올까? 나의 우려는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宋昌植, 徐酉錫, 조동진에서부터 윤도현에 이르기까지 한국 포크음악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3천8백석의 좁고 딱딱한 의자는 금방 가득 채워졌다. 관객층은 50대에서 20대 초반까지 넓게 분포되었으며 중년의 부부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한국포크음악30주년 기념사업회는 이틀간의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4월20일부터 5월2일까지 8백60석의 호암아트홀에서 가수 별 개인 콘서트 공연도 성황리에 마쳤다. 경기 불황기에 1만5천원에서 3만원까지 티켓을 팔아 마련한 포크 페스티벌이 성공을 거둔 것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꿏핀 청년문화의 뿌리가 그만큼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청년들이 일구는 문화는 모두 청년문화라고 할 수 있지만 유독 1970년 전후의 「청년문화」는 고유명사로서 존재한다.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대변되던 청년문화. 그 시절의 청년문화는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1960년대 말에 꽃핀 청년문화는 해방을 전후로 해서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 만든 문화였고,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해방동이들이 만든 청년문화를 능가하는 청년문화는 없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른바 청년문화의 기수라고 일컫는 일단의 무리들이 내놓은 동일한 의견은 1960년대 후반이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에는 성인문화, 즉 장년문화만 있었을 뿐 청년문화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일제시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성인중심의 문화를 새로운 문화로 바꾸는 것은시대적 요청이었으며 필연적이었다고 진단했다.

한국문화의 르네상스
가수 趙英南씨(54)는 1960년대 말 음악 미술 문학에서 동시 다발로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 힘이 모여 한국문화의 르네상스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그때 우리가 한 행위가 새로웠다고 생각되지, 당시에는 우리가 청년문화를 일으킨다, 우리가 앞장서서 새로운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한 건 아니에요. 오랫동안 지리한 재래문화가 이어져 오다가 어느 순간 폭발했다고 봐야죠. 곪은 게 터졌다고 할까요?』
청년문화의 기수들은 그저 좋아서 함께 몰려다녔을 뿐 그 일이 나중에 청년문화라는 이름으로 규정될 때 쑥스러웠다고 얘기했다.

趙英南씨는 청년문화가 꽃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해방을 전후해서 태어난 세대들이 서구화의 영향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1960년부터 방송을 시작한 AFKN을 통해 팝송을 듣고 자란 세대는 이전과 다른 문화를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방송국에 팝 프로그램이 처음 등장 한 것은 1963년 4월 동아방송의 「탑 튠 쇼」인데 이를 필두로 우리 방송을 통해서도 팝음악이 많이 전파되었다.

가수 尹亨柱씨(52)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준 서구 가수로 비틀즈, 클리프 리차드, 밥 딜런, 존 바에즈, 주디 콜린즈, 펩분, 엘비스 프레슬리, 지미 로저스, 행크 윌리암스, 리키 넬슨, 쟈니 마티스, 딘 마틴 등을 꼽았다.
개그맨 全裕成 씨(51)는 당시 기타와 드럼만으로 연주를 하는 비틀즈가 인기를 끌면서 1965년경부터 기타붐이 일었다고 전한다.
『기타치면서 타향살이와 상하이트위스트를 부르고 야외전축을 들고 나가 춤을 추던 시기였죠』

1960년대 후반, 가요계에만 변화가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미술계, 문학계, 영화계 등 우리 문화 전반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대중들이 가장 손쉽게 변화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던 분야가 바로 가요계였다. 이른바 통기타 가수의 출현은 새로운 문화를 갈구하는 대중들의 구미와 맞물려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1960년대 초반부터 미8군 무대에 섰던 포클로버스, 패티김, 윤복희, 현미, 한명숙, 신중현 등을 비롯한 여러 가수가 서구음악을 받아들였지만 1960년대 후반 趙英南, 트윈폴리오를 비롯해 새롭게 등장한 일단의 가수들의 폭발력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당시 라디오와 TV에서 PD 일했던 뮤직네트워크 趙鏞浩 전무(60)의 평이다.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데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61년 쿠데타를 통해 朴正熙 정권이 집권하게 되면서 이미 사회변화가 예고되어 있었던 것. 1960년대는 금지곡이 양산되던 시기였는데 1962년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비롯한 수많은 곡을 금지곡으로 선정했다. 1968년의 3선 개헌과 1972년 유신체제로 들어선 엄혹한 朴正熙 정권 아래에서 젊은이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을 때 또래 젊은이들이 번안곡과 서구취향의 자작곡을 들고 나오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던 시기
사회전반에 새롭게 일고 있던 문화현상과도 연관이 있다. 1967년에 바캉스, 1968년에 레저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등장했으며 1967년에 미니스커트, 1968년에 깔깔이 드레스가 유행했다. 같은 해에 대중잡지 「선데이서울」이 등장한다. 1958년 종암동 고려대학교 옆에 17평형 아파트가 등장한 이래 1972년에 반포에 아파트단지가 숲을 이루었는데 이미 1960년대 말에 이미 아파트 프레미엄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주방설비로 대표되는 아파트 문화는 개인 프라이버시 보장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한다.

全裕成씨(51)는 1964년경에 이미 고등학생들이 구제품으로 멋을 내고 청바지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전한다. 특히 외제 청바지가 인기를 끌면서 가짜가 등장해 친구들 사이에 외제 청바지인지 아닌지 감별하는 감별사까지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보릿고개가 남아있었지만 1960년대 말에 이미 중산층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억압과 함께 「잘 살아보세」라는 기치아래 경제성장이 시작된 것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趙英南씨는 1960년대 말을「힘들었지만 나라 전체가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던 시기」였다고 기억했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37)는 청년문화의 출현을 「처음으로 세대분리가 일어난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서구 자유주의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선민의식과 서구동경이 새로운 문화적 움직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청년문화의 특징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점이라고 진단했다.

「한국대중가요사」의 저자인 연극평론가 李英美씨는 1970년대의 포크송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1970년대의 포크송은 기성세대문화, 성인문화에 대항하는 청년문화, 신세대 문화라는 구도가 처음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였다....뽕짝은 촌스럽고 질 낮은 노래라는 식의 감각적 반발이나 일본적인 것보다 미국적인 것이 세련되고 아름다워 보이는 美的 典範(미적 전범)의 교체 현상이 세대적 갈등으로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통기타 가수들의 고향 쎄시봉
청년문화는 곧 통기타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방송을 통해 대중들에게 폭넓게 전파되기 전, 다운타운가를 중심으로 서서히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종로와 명동의 음악감상실 중에서 특별히 쎄시봉, 오비스 캐빈, 또 YMCA의 청개구리가 새로운 문화의 진원지였다.
청년문화 기수들을 만나 취재를 하는 동안 대부분 30년 전의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대충 거기서 그때쯤 그랬을 것이고 어쩌다 만나게 된 것 같다고 말하기 일쑤였는데 이른바 통기타 족보를 꿰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가수 尹亨柱씨이다.

먼저 趙英南과 尹亨柱는 동대문에 있는 동신교회 고등부 성가대 선후배 사이. 李章熙의 삼촌과 趙英南이 친구 사이여서 趙英南과 李章熙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연세대에 재학 중이던 尹亨柱는 1966년 10월 미도파 음악살롱 노래자랑에 참가했다가 알게 된 李章熙와 함께 유종국까지 포함한 '라이너스 트리오'를 조직했다. 尹亨柱와 宋昌植은 1967년 11월에 쎄시봉에서 만났다. 이 둘과 이익균은 '세시봉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다가 이익균이 입대를 하면서 1968년 3월 전설적인 듀오 트윈폴리오가 탄생한다.

楊姬銀은 尹亨柱의 고등학교 영어연합서클 후배이며 金敏基는 尹亨柱의 경기고등학교 3년 후배이다. 김세환은 尹亨柱가 옮겨간 경희대학교에서 만난 후배. 또 개그맨 全裕成의 아버지와 尹亨柱는 잘 아는 사이였다. 소설가 崔仁浩씨와 영화감독 李長鎬씨는 서울고 동기이며 이들은 李章熙의 서울고 2년 선배였다.
비록 尹亨柱 씨가 만든 통기타 족보가 자신을 중심으로 관계 설정이 되어있지만 이른바 청년문화 기수들이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1960년대는 오디오를 갖고 있는 가정이 드물어 젊은이들이 음악감상실에 모여 함께 음악을 감상하던 시기였다. 성균관 대학교에 다니면서 명륜동 카사노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徐酉錫씨(54)는 이대 앞 숙녀다방, 연대 앞 독수리다방, 서강대 앞 왕자다방, 성대 앞 명륜다방이 유명했으며 무교동 쎄시봉 음악감상실, 학생들의 노래자랑이 열렸던 미도파 살롱이 명소였다고 전했다.

尹亨柱씨는 당시 주간에는 다방 야간에는 살롱으로 변하는 「주다야싸」가 유행이었다며 종로2가의 성전다방, 명동의 성보다방, 삼각동의 태평양다방이 유명했다고 소개했다. 통기타 가수들이 출연하는 생맥주 업소로는 오비스 캐빈, 금수강산, 짝짝꿍, 오라오라, 쉐그린, 영타운 등이 있었다.

무교동의 쎄시봉은 대부분의 청년문화 기수들이 데뷔 무대를 가진 곳. 쎄시봉 문화가 싹트는 계기를 마련한 가요평론가 이백천씨(66)의 얘기를 들어보자.
『1964년 5월 어느 날이었어요. KBS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미8군 라디오와 시내 유명 음악감상실이 방송국보다 음반이 많았죠. 음반을 빌리러 쎄시봉에 들어가는데 젊은이들이 강변에 잡초처럼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있더군요. 좌석이 4백석 정도되고 좋은 레코드 판이 많은데 장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내가 주인에게 음악 해설을 하겠다고 제의했죠. 다양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는데 대학생들이 모여서 기량을 뽐내던 '대학생의 밤'이 통기타 가수들의 데뷔무대가 되었죠』

이백천 씨는 많은 가수들이 쎄시봉 무대에 처음 서던 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尹亨柱가 '로스 러브'를, 宋昌植이 이태리 가곡인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를 때 관객들이 쥐죽은 듯이 조용했지요. 그때까지 접하지 못한 새로운 음악을 접하게 된 겁니다. 尹亨柱는 의대생이었는데 아버지인 경희대 尹永春 학장이 찾아와서 공부해야 하니 노래 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죠. 즉흥드라마도 했는데 全裕成이 양복에다 파란 넥타이를 메고 나오더니 가위로 넥타이를 싹뚝 잘라서 관객들을 놀라게 했죠. 그 의외성이 대단했지요』

청년문화가 싹트던 시기
어느 날 이백천씨 대신 무대에 섰다가 삼행시 발표날 마다 사회를 보게 된 이상벽은 당시 홍대 미대생이었다. 이상벽이 사회를 보던 어느 날 趙英南이 화창한 날에 우비에 장화를 신고 나타났다. 정상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상한 행색이었으나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시작하자 모두들 감탄을 했다. 李章熙는 팝송「서니」를 부르면서 英詩를 즐겨 암송했고 박상규와 정광태는 코믹한 노래를 주로 했다.

김도향, 조동진도 쎄시봉에 자주 출연했던 인물. 여자 가수로는 최영희가 있었고 기타리스트 姜根植, 탤런트 윤여정도 단골손님이었다. 미국에서 온 한대수도 쎄시봉 무대를 거쳐갔고 영문학자 피천득 씨의 아들 피세영 씨는 DJ를 맡았다. 소설가 崔仁浩, 시인 김지하, 영화감독 李長鎬 씨, 젊은 화가 金丘林, 鄭燦昇, 鄭江子 씨도 쎄시봉의 단골손님이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젊은 영화인, 작가, 기자들도 많이 출입했던 명소였다.

쎄시봉에서는 초대손님을 모시는 시간도 있었는데 당대 유명가수였던 포클로버스를 비롯해 김강섭 김용선씨 등 방송국 지휘자들도 출연했다. 또 당대 쟁쟁한 코미디언 具鳳書씨를 초청한 날은 쎄씨봉 관객들이 그를 즐겁게 하기도 했다. 사회유명인사를 초청해서 강연을 듣기도 했는데 金大中 대통령도 초청인사 중의 한 명이었다. 이백천씨는 쎄시봉에서 본 金大中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당시 대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할 때 열혈한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중을 흥분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죠』

당시 쎄시봉에서는 새로운 음악이 나오면 별점으로 테스트를 해서 그 결과를 정홍택 기자가 「주간한국」에 실었는데「동백아가씨」의 경우 왜색이 짙다는 이유에서 별점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1970년도 무교동 재개발로 사라지기까지 쎄시봉은 청년문화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백천 씨는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쎄시봉을 다녀간 젊은이가 연인원 20만명 정도 될 것으로 추산했다.

쎄시봉이 대학생들의 발표장이었다면 오비스캐빈은 가난한 뮤지션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 곳이다. 지하는 그릴, 1층은 경양식, 2층은 통기타 연주, 3층은 신중현 밴드 출연 등 다양한 공간을 가진 오비스캐빈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린 공간이었다.
尹亨柱씨는 宋昌植씨와 함께 노래가 끝난 뒤에도 음악을 듣고 작곡을 하느라 오비스캐빈에서 피아노 덮개를 덮고 자기 일쑤였다. 둘이 늘 붙어 있는 바람에 혹시 동성연애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楊姬銀씨(47)는 1971년부터 오비스캐빈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며 매우 고마운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때 오비스캐빈에서 함께 노래했던 여자가수로는 은희, 박인희 씨가 기억난다고 한다.
쎄시봉이 없어지면서 이백천씨를 비롯한 쎄시봉에서 활동하던 무리들이 YMCA 청개구리로 옮겨갔다. 청개구리 무대를 통해 왕성한 활동을 펼친 가수들로 徐酉錫과 金敏基 楊姬銀 투코리언즈를 들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해 저변확대
다운타운가에서 일고 있던 새 바람이 대중에게 널리 전파된 것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였다. 이종환씨가 진행한 MBC「별이 빛나는 밤에」피세영씨에 이어 최동욱씨가 진행한 TBC「밤을 잊은 그대에게」최동욱씨가 TBC로 옮겨가면서 尹亨柱씨가 바톤을 이어받은 DBS 「0시의 다이알」이 당시 인기를 끈 라디오 방송이었다. 임문일씨에 이어 高榮秀씨가 진행한 CBS 「꿈과 음악 사이」와 楊姬銀씨가 진행한 「우리들」도 인기 있는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현재 CBS에서「행복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高榮秀씨(49)는 당시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던 이종환씨가 젊은 통기타 가수들을 대거 등장시켜 통기타 노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고 전했다.
『이종환 씨는 보수적인 분위기를 타파하고 공개방송에 신인들을 과감히 스카우트하여 무대에 세웠어요.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죠』

자신이 통기타 가수이면서 방송을 진행하게 된 尹亨柱씨는 매일 밤 라이브 무대를 마련해 통기타 가수들에게 데뷔의 길을 열었다.
『이용복, 4월과 5월, 쉐그린, 뚜아와 무아, 이연실 씨가 다 '0시의 다이알'을 통해 데뷔했습니다. 당시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하는 라디오 방송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죠』
개그맨이라는 말은 全裕成씨가 DBS 「0시의 다이얼」개그스테이지에 출연하면서 생겨났다. 개그맨 1세대인 全裕成씨는 코미디언과 개그맨을 이렇게 분류했다.
『코미디언들이 극장쇼를 통해 활동을 시작했다면 개그맨들은 방송에서 만들어진 희극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미디언은 선배들에게 배웠다면 개그맨들은 자생적으로 컸다고 할 수 있죠. 코미디가 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면 개그는 혼자서 짧은 유머를 얘기하는 것이었죠』

全裕成씨는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이 싸우는 걸 「육박전」이라고 얘기했다가 3개월 동안 방송정지를 당했다. 또 제비이야기를 하면서 박씨를 물고 갔다는 부분에서 「박씨」 때문에 심의에 걸렸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들려주었다.

개성시대를 예고한 조영남의 등장
라디오를 통해 통기타 가수들의 저변이 점차 확대되었다면 TV 출연은 시각적인 효과와 함께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에 TBC TV, 1969년에 MBC TV가 개국했는데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음악 프로그램은 TBC의 「쇼쇼쇼」였다. 초창기에는 주로 미 8군에서 활약하던 가수들이 팝스타일의 노래를 선보이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음악감상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학사가수들을 등장시켰다. 당시 「쇼쇼쇼」 AD였던 趙鏞浩씨는 세련된 음악을 선보이자는 의도에서 트로트보다는 팝스타일의 가요를 주로 선보였다고 전한다. 이백천씨는 趙英南씨가 TV에 처음 등장할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1965년도에 趙英南이 쎄시봉에서 톰존스의 노래를 비롯해 팝송 몇곡을 불렀는데 앞으로 일을 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1967년도에 TBC 「쇼쇼쇼」의 황정태PD에게 趙英南을 추천하면서 趙英南이 하겠다는 대로 그대로 하게 놔두라고 말했죠. 「딜라일라」를 불렀는데 웃통을 벗고 머리띠를 두른 채 도끼를 들고 노래 부르다가 한쪽에 마련해둔 커튼을 도끼로 쭉 찢었어요. 얼마나 파격적이었을지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서울음대생이었다는 것과 최초로 성악톤으로 가요를 불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제가 되는 마당에 충격적인 무대를 선보였으니 반응이 실로 엄청났다. 趙英南 씨는 그날 방송 이후 그야말로 하루 밤 만에 「완전히 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趙英南 씨는 서태지가 랩을 들고 나왔을 때와 반응이 비슷했다며 자신의 등장으로 외모와 관계없이 방송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껄껄 웃었다.

『그동안 가수 문화가 누각처럼 떠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현실과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면 속의 가수가 아니라 아무 격식도 차리지 않는 대중가수가 출현했다고 볼 수 있죠. 개성시대가 시작된 거죠』
趙英南 씨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통기타 가수들은 퍼스낼리티를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때까지 가수는 노래만 했으나 통기타 가수들은 방송진행자로 활동하거나 대화손님으로 초대되었다.

아름다운 음색과 완벽한 화음을 구가한 트윈폴리오도 등장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宋昌植 尹亨柱로 구성된 트윈폴리오가 활동한 것은 1968년3월부터 1969년 12월까지 1년 10개월에 불과한데 많은 사람들은 대단히 오래 활동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楊姬銀씨는 트윈폴리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때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음악은 파장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영향 받지 않는 게 아니죠. 통기타 가수들의 입는 옷, 웃음, 몸짓 하나까지도 어린 날의 감수성에 영향을 줬어요. 제복의 시대에 그들은 하나의 표상이었지요. 트윈폴리오를 보고 기타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때까지 가수들은 밴드에 맞추어 노래를 했죠. 가수 흉내를 내고 싶어도 경음악단이 없으면 불가능했는데 통기타는 달랐죠. 품에 안고 기타를 치면 마치 가수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통기타 가수들이 사랑 받은 또 하나의 이유였다고 봅니다』

통기타의 전설 트윈폴리오
통기타 가수들은 초기에 대체로 외국 곡을 번안해서 불렀다. 외국 곡을 그대로 부를 수 없다는 규제 때문에 번안을 하였는데 宋昌植씨(51)는 번안을 하면서 저절로 가사를 만드는 연습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미 곡이 있는 데다 말을 맞추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자연히 말 다듬는 솜씨가 생겼지요. 그런 것은 규제의 덕을 봤다고 할 수 있죠』

당신 번안되었던 트윈폴리오의 「하얀손수건」 「웨딩케익」「축제의 밤」등은 오래도록 사랑 받았다. 번안곡을 부르던 통기타 가수들이 서서히 자작곡을 만들기 시작해 이른바 싱어송 라이터 문화가 꽃피우게 된다.
일반적으로 포크가요의 태두라고 불리는 한대수씨(51)가 미국에서 자작곡을 들고 귀국했던 1968년을 싱어송라이터의 출발점으로 보는데, 宋昌植씨는 한대수씨의 등장 이전부터 국내에서 자작곡을 만드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尹亨柱씨는 초창기 자작곡은 낭만적이었으며 순수했다고 전한다.
『곡이 아름답고 가사 내용이 시적이고 서정적이었지요. 당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통기타 가수들이 그들의 정서에 알맞은 곡을 발표하자 많은 호응을 보냈죠』

가요평론가 이백천씨는 팝송에 영향을 받은 통기타 가수들이 우리 실정에 맞는 노래를 내놓은 것은 대단한 수확이라고 말한다.
『팝송이지만 우리말로 번안해서 부르고 또 자작곡을 만들면서 한국정서에 맞는 노래들이 나오게 된 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동남아 국가가 팝송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식민지화 된 것과 좋은 비교가 되죠. 소리나 음악을 빼앗기는 것은 영혼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씨 역시 통기타 가수들이 자작곡을 통해 우리 식의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또 대중음악이 그 동안 사랑이나 추억 등 탈현실적인 주제만 다루다가 사회적 관심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통기타 음악이 출현하면서 음악의 단순수용자들이 적극수용자로 바뀌었으며 기타 하나로 몇 십 명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공동체적 요소를 갖고 있었던 점도 긍정적인 면이라고 말했다.

저항의 상징 포크가요
통기타 가수들을 일반적으로 포크가수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잘못된 개념이다. 포크는 민요라는 뜻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저항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宋昌植씨는 포크송을 '멜로디가 단순하고 가사에 메시지가 담겨있는 노래'라고 정의했다. 청년문화의 기수로 불리는 가수들이 저마다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趙英南씨는 처음부터 악단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했고 통기타 가수들은 초기에 가사에 메시지를 담지 않았다. 60년대 후반에 출발한 가수들이 대부분 통기타로 반주를 했기 때문에 그들을 통칭 통기타 가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포크송의 출발은 한대수라고 할 수 있다. 한대수씨가 자신이 만든 곡을 들고 미국에서 귀국해서 드라마센터에서 리사이틀을 연 것이 1969년이다. 이 때를 한국 포크가요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한대수씨 역시 쎄시봉에서 데뷔무대를 가졌는데 치렁치렁한 머리에다 가슴팍에 조그만 하모니카가 달린 철제 받침대를 하고 등장해 자작곡을 불렀다. 그는 리싸이틀에서 「행복의 나라로」「옥의 슬픔」「마지막 꿈」「고무신」등을 불러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의 노래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히피같은 그의 행색이 문제되어 신문에서 질타를 받고 방송 출연도 곧 중단되고 말았다.

한대수를 시작으로 徐酉錫, 金敏基 등이 저항적인 가사를 담은 포크송이 발표했다. 徐酉錫 씨는「학교 앞은 책방은 하나 양장점은 열,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 대포집은 열」이라는 가사의 「파란 많은 세상」과 「세상은 요지경」 등의 노래를 통해 세태를 비판했다.
저항문화의 상징인 金敏基씨(48)가 1970년대 만든 노래는 1980년대에 학생운동 현장과 노동운동 현장까지 그 생명력을 이어갔는데 정작 그는 의도하고 만든 노래는 하나도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 「친구」는 고3 때 같이 동해안에 갔다가 익사한 친구를 그리워하며 만든 노래이고 「아침 이슬」도 아침 동산의 풍경을 마음에 비춰 만든 노래라고 한다. 「상록수」는 결혼식 축가로 만들어진 노래.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는 金敏基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평한 바 있다.
『트로트와 전쟁 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미국의 대중음악에 대한, 그리고 우리 대중음악의 정치적 사회적 무관심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반격의 예광탄이 되었다. 이 반박의 대상에는 트윈폴리오로 대표되는 6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에 일기 시작한 통기타 현상과 양병집, 徐酉錫 등 밥 딜런 류의 비판적 대중음악을 일차적으로 본뜨던 사조까지 포함된다』

김민기의 힘
성공회대학교 신방과 김창남 교수는「金敏基 작품론」에서 청년문화가 주류문화의 상업적 매커니즘 속에서 애초의 순수한 열정을 잃어가기 시작할 때 여전히 반대편에 남아 정신적 중심을 잡아줬던 것이 金敏基의 음악이었다고 평가했다. 金敏基의 음악이 오래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상업주의적 의도나 전략의 산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며 권력의 오랜 박해와 금지는 사실상 그의 음악이 지난 사회적 정당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는 것이다.

연극평론가 李英美 씨는 金敏基에 대해 「대중가요가 가장 즐겨 쓰는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 없는, 우리나라 대중가요 창작자로서는 전무후무하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노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할 말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고 평했다. 宋昌植씨는 전세계에서 포크송 만드는 솜씨만 가지고 따진다면 「金敏基가 세계에서 1등」이라고 평가했다.

金敏基가 젊은이들의 희망과 아픔을 노래로 옮겼다면 楊姬銀은 그 노래에 생명을 불어넣어 널리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楊姬銀씨도 자신이 한 때 운동권 가수로 인식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신문지상을 통해 밝힌바 있다. '아침 이슬'로부터 그가 부른 노래 30여곡이 금지곡이 된 이유는 퇴폐가사, 時宜(시의) 부적절, 허무주의 조장 등이었는데, 그에 대해 「우스꽝스런 해프닝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아침 이슬」의 가사 중 「태양을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가 문제되었는데 붉은 태양이 북쪽의 인사를 암시하고 묘지는 유신시대를 뜻한다는 해석 때문에 금지곡이 되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포크가요를 부르면서 숨통막히는 유신시대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金敏基의 노래 뿐만 아니라 宋昌植의「왜 불러」「고래사냥」 李章熙가 작곡해서 趙英南 불렀던 「불꺼진 창」도 금지곡이었다. 趙英南 씨는 자신의 수필집 「놀멘 놀멘」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어떤 때는 외국노래를 방송에서 못 부르게 할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부르게 할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완전히 가사를 우리말로 바꿔야 부를 수 있는 때도 있었다. 尹亨柱는 「오! 슈가 슈가」라는 노래를 직역해서 「오! 설탕 설탕」이라고 불러야 했다』

趙英南씨가 번안해서 부른 '딜라일라'도 금지곡이었는데 가사 중에 '복수에 불타는 마음만 가득찼네'의 복수가 퇴폐적이고 부도덕하다는 게 금지 이유였다. 趙英南씨는 시민회관에 「신고산 타령」을 잘못 불러 군대에 끌려갔던 장본인. 「신고산이 와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 어라어랑 어허야」하고 노래 불렀던 것이 화근이었다.

젊은 미술학도들이 벌인 해프닝
비단 가수들만이 청년문화를 일군 것은 아니다. 소설가 崔仁浩씨는 당시 영화의 李長鎬, 만화가 고우영, 바둑의 서봉수 작곡가 강석희 등 젊은 파워가 갑자기 대두되었다고 회고한다. 趙英南 씨는 특히 鄭燦昇(작고), 강국진(작고), 鄭江子, 金丘林 씨등 미술계 인사들의 변화가 대단했었다고 전했다. 서양화가 鄭江子씨(57)는 당시 홍대 미대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고 말한다.
『우리 미술 역사에 새로운 태동이 없었어요.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온 교수들에 의해 추상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었죠. 우리끼리 모여서 교수들을 그대로 답습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모색해야 한다, 미술은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대중과 친해져야 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밤을 샜죠. 당시 이미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나왔고 미국에서는 팝아트가 유행하고 있을 때죠』

1967년 무, 신전, 오리진 동인이 모여 한국청년작가 연립전이 소공동에 있는 공보관에서 열렸다. 전시회에 앞서서 청년 작가들은 「예술은 대중과 친하다」「현대미술관이 없는 한국」「오십시오 무료입장」「와서보고 느껴요」「행동하는 화가」라는 피킷을 들고 거리 행진을 했다. 피킷 덕분이었는지 전시관은 초만원을 이뤘는데 鄭江子씨는 넘치는 관객들을 통해 청년들이 새로운 문화를 갈구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전시회에서 최초로 설치작품을 선보였는데 미술평론가 윤진섭씨는 당시의 전시를 이렇게 평한다.
『그전에는 회화작품 일색이었죠. 한국 청년문화연립전에서 설치작품이 선보이면서 우리 미술계에 다양성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가수 남일해씨의 동생인 鄭江子씨는 68년 5월30일 쎄시봉에서 '투명과 누드'라는 제목의 해프닝(즉흥 예술)에 직접 참가하여 충격을 안겨줬던 인물이다. 강국진 鄭燦昇과 함께 한 이 해프닝에서 鄭江子씨가 팬티만 입은 채 서 있고 관람객들이 몸에 투명한 풍선을 붙여 나갔는데, 해프닝이 발표된 후 매스컴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鄭江子씨는 언론인터뷰에서 해프닝을 하기 위해 모델을 구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아 자신이 직접 옷을 벗었으며 '벗을 만한 이유가 있을 때 몽땅 벗는 것은 물론 해프닝 중에 필연적인 경우 작품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매우 파격적인 발언을 했다. 해프닝을 목격한 통기타 가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시의 상황이 대단히 충격적이었다고 전했다.

1968년 10월 鄭燦昇 강국진 鄭江子 트리오는 한강변에서 「한강변의 타살」이란 제목으로 다시 한번 해프닝을 벌였다. 이들은 한강변에서 강바람의 모래 속에 몸을 묻고 찬물 세례를 받으면 문화사기꾼, 문화 실명자, 문화 기피자, 문화 부정축재자, 문화 곡예사의 고발장을 불에 태웠다. 이들의 행위에 대해 모 대학 교수는「일종의 예술 깡패일 것이다. 어줍잖은 발언권의 과시이며 욕구불만의 발산이다. 그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정신병자가 되어 입원하든지 자살을 하고 말 것이다」라고 평했다.

1969년에 세 사람은 사이비 문화인에게 고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뒤 선언문을 담은 꽃관을 메고 사직공원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결국 그들은 국회의사당(현 코리아나 호텔) 앞에 이르렀을 때 경찰관 붙잡히고 말았다.
1970년 8월15일 화가 金丘林씨를 중심으로 鄭燦昇, 鄭江子, 강국진, 방거지, 손일광 씨등이 조직한 제4집단이 출범했으며 출범 기념행사로 기성문화 예술과 기존 체제에 대한 장례식을 갖고 거리행진을 하다가 도로교통위반법으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金丘林씨(63)는 당시를 빨간색을 마음 놓고 쓸 수 없던 숨막히는 때라고 얘기한다. 세시봉과 오비스캐빈, 명동 뒷골목의 막걸리 집에서 연극 영화 연예계 사람들과 함께 장식을 위한 예술이 아닌 진실된 예술을 통해 표현을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고 전한다. 문화 선진국을 추구한 제4집단의 움직임은 일본까지 알려질 정도로 요란했었고 金丘林씨는 오랫동안 당국의 미행을 당했다.

당시 미술계 일각에서 일었던 변화에 대해 미술평론가 윤진섭 씨는 실험적 미술로 대단히 파격적이었으며 제도권으로 진입하지 못했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진단했다.
『전후 56년도에 엥포르멜(추상)운동이 있었지만 이들이 제도권으로 편입하자 홍대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 선배들과 차별화하려는 실험의 열기가 뜨거웠죠』
미술계에서 일었던 변화는 대중들은 물론 당시 문화 종사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청년문화 논쟁
통기타 가수의 등장으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곧바로 청년문화라는 이름이 붙은 건 아니다. 1970년 2월호 「세대」에 언론인 남재희씨는 趙英南 최영희가 청년문화의 스타로 부각되어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쓰면서도 제목을 「청춘문화론」이라고 정했다. 1970년도 들어서면서부터 청년문화라는 단어가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청년문화의 기수라고 불리는 사람은 소설가 崔仁浩씨(54)였다.

崔仁浩씨는 약관 26살에 朝鮮日報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했는데 젊은 나이에 신문연재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혁명적이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주로 40세 이상 된 작가들이 신문연재를 했다. 崔仁浩씨는 통기타 그룹들이 팝송에 영향을 받았다면 1970년대 작가군으로 분류되는 한수산, 조해일, 조선작씨는 한글 세대였다는 것이 이전 작가들과 다른 점이라고 규정했다. 「별들의 고향」은 상업주의 문학 논쟁을 불러왔는데 실제로 상업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가져왔다. 「별들의 고향」은 80만부나 팔렸고 영화화 되었을 때 5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社告(사고)를 통해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많이 읽히고 나중에 기억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그대로 적중했죠. 청년문화를 얘기하는 건 나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죠.「별들의 고향」이 나의 대표작처럼 얘기되는 것도 그렇고 「별들의 고향」에 대한 편향된 해석도 저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죠. 청년문화의 기수라 아니라 괴수라고 불리곤 했죠』

崔仁浩씨는 소설을 생계수단을 삼은 최초의 전업작가로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며 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영화화된 것이지 영화나 가요 등 다른 문화와 연계해서 상업주의로 확산해 나간 적은 없다고 말한다.
『李長鎬는 고교 동기이고 李章熙는 잘 아는 동생입니다. 함께 어울려 영화를 만들고 영화음악을 만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음악감상실에서 자주 어울리면서 李章熙와 宋昌植의 부탁으로 가사를 써주었죠』

宋昌植씨는 崔仁浩씨에 대해 '무엇이 히트할 지 아는 감각이 뛰어난 사람, 희대의 재주꾼'이라고 평했다.
한편에서는 조세희, 윤흥길 씨의 노동자 문학이 각광받았는데 崔仁浩씨는 1970년대가 산업사회로 들어가는 초창기여서 공장노동자와 호스티스 등 특별한 소재들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당시 기성세대와 언론에서 통기타와 생맥주 청바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에 대한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면서 청년문화 논쟁이 일게 된다. 청년문화의 기수로 불리던 崔仁浩씨는 1974년 4월24일자 한국일보에 「청년문화 선언」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모 대학의 사회학 교수가 「우리 나라에는 청년문화는 없고 대학생으로 대표되는 대학문화 혹은 엘리트 문화, 생맥주 고고를 즐기는 대중문화, 통기타 가수들에게 심취하는 '공돌이 공순이'들의 근로자 문화로 나누어지는데 이 세 문화는 서로 상통하는 의미도 없으며 오직 이들의 문화는 대학생인 엘리트 문화에 의해 선도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한 반박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崔仁浩씨는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소수 엘리트 사고방식과 대중의 사고방식의 간격을 좁히는 것에서 시작된다」며 청년문화 선언을 시작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겐 고전이나 권위나 위선 남녀간의 차별 따위를 인정치 않으려는 집요한 노력이 있고 그 노력의 갈등으로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청년문화가 생성되고 있다며 「이 전의 문화가 소수의 엘리트를 보고도 다수의 대중들을 예견할 수 있는 하향식 문화였다면 청년문화는 침묵의 다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의 문화」라고 규정했다.

또 젊은이들에게 허위와 위선과 권위, 훈장, 격식을 보이지 말고 변명을 하지 말라, 오직 진실만을 얘기하라며 「젊은이들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정직한 침묵의 대중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제가 나타나 분연한 이론으로 우리들을 빠르고 신속하게 눈뜨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고 끝맺었다.

비단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당시에 학생운동의 주체들이나 대학신문사 등을 통해 담론을 주도하고 있던 대학생들도 당시 청년문화를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당시 고대 김상협 총장, 성공회 김성수 신부, 정신 심리학자 이시형 박사, 미술평론가 이일 씨, 여류화가 비함 씨등은 긍정적인 시선으로 청년문화를 바라본 사람들이다.

1974년 5월26일자 주간조선 朴光星 기자가 쓴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지대 르포」를 보면 언론의 시각이 곱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마시고 퉁기는 게 청년문화인가」라는 큰 제목 아래 '작업복서 유행복으로 바뀐 청바지, 흉내 음악의 장식물 통기타, 골빈당이 마시는 술 생맥주'라는 중간제목만 봐도 이미 기사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청바지 1벌에 2천5백원에서 4천원선, 맥주 1천cc에 5백30원, 통기타는 2천원에서 3천원이라는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는 이 기사는 「한창 공부해야할 나이의 학생들이 일부 유행에 따라 작업복 아닌 유행복으로서의 청바지나 맞춰 입고 통기타나 두드리고 생맥주나 퍼마시면서 이것이 소위 청년문화라고 내세운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며 우리의 자랑할만한 젊은 지성들은 자칭 '청년문화의 기수'들을 타기하고 있으며 일부 매스컴의 청년문화 시비론 및 誤導를 불만스런 눈으로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다」고 끝맺었다.

청년문화를 강타한 대마초 파동
1960년대 언더그라운드에서 숙성되어 1970년대 전면으로 떠오른 청년문화는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제동이 걸린다. 당시는 10월 유신으로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의 토대를 만든 이후 긴급조치가 본격적인 발효된 시기이다. 통기타와 생맥주, 청바지, 장발 등의 퇴폐적인 분위기, 저항 메시지가 담긴 노래, 관을 메고 거리를 행진하는 미술가, 청년문화 선언을 하며 기성세대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작가. 위험하고 못마땅한 이들을 대마초 단속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정리에 나선 것이다. 많은 청년문화의 기수들이 구속되고 금지곡이 양산되었으며 한대수는 당시 2집음반 「고무신」의 수록곡 상당수가 사전심의에 걸려 출반할 수가 없었다.

宋昌植씨는 통기타 1세대들의 활동이 전면 중지된 것 뿐만 아니라 김현식, 전인권, 이승희 최성원 등이 통기타 세대를 이어갈 재목들이 대마초 파동으로 싹도 피워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전한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74년과 1975년 최고조에 달했던 청년문화는 기세가 완전히 꺾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는 대마초는 누구나 쉽게 피우던 때인데 예고도 없이 게다가 관련법도 없이 단속을 했으니 단속자체가 위법이라는 게 청년문화 기수들의 의견이다. 대마초를 습관성 의약품으로 규정해서 구속했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는 반응이었다.

崔仁浩씨는 당시 청년문화가 두 군데서 협공을 받았다고 말한다.
『학생운동권에서는 상업주의로 보고 집권세력은 퇴폐로 보았죠. 공교롭게도 청년문화는 회색분자가 되어버렸죠. 한쪽에서 보면 우리가 술마시고 노래하면서 유신체제를 잊어버리는 것으로 보이고 한쪽에서는 장발에 대마초를 피우는 부도덕한 아이들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었죠. 문화는 체제와 반체체의 대결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비체제여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비극은 제체와 반체제의 대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만약 대마초 구속사건이 없었다면 청년문화는 어떻게 이어졌을까. 崔仁浩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청년문화의 긍정적인 요소라면 우리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가부정적 권위와 이중성에서 솔직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시니컬한 민중주의에 의해 청년문화의 싹이 잘리고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갑자기 어두움이 찾아오자 다시 엄숙주의로 돌아갔습니다. 청년문화가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우리 사회의 문화현상들이 조금 빨리 왔을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개성이 좀더 다양화 되었겠죠』
싹을 잘랐다고 생각했던 포크송은 1980년대에 조동진 정태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통해 활짝 피어났으며 1990년대에 안치환, 장필순, 윤도현 일기예보 등을 통해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다.

아끼고 도와주고 사랑하는 문화
청년문화의 기수들이 말하는 청년문화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도와주는 문화가 청년문화라고 정의했다. 趙英南씨는 수필집 「놀멘놀멘」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끊임없이 몰려 다니며, 있으면 나눠먹고 없으면 굶는 '키브츠'같은 운명공동체를 이루어갔다. 우리는 공동운명체에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또 받아가면서 약간은 진보적인 성향으로 무럭무럭 커갈 수가 있었다. 나는 요즘 후배가수들이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걸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할 때가 많다...맹세코 말하건대 우리 때엔 그런 게 없었다. 우리는 가수나 연예인이라고 해서 누구 하나 티를 내는 사람도 없었고 유명인이라고 해서 과장된 겸허나 교만을 부릴 줄도 몰랐다. 어쩌다가 얼렁뚱땅 연예인이 된 폼으로 오히려 모두가 어설퍼 보였다. 크게 욕심부리는 친구들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 멤버 중에 李章熙나 金敏基 혹은 김도향이가 나중에 한사코 가수이기를 거부한 것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全裕成씨는 당시에는 어디 공연할 데가 있다고 하면 돈을 적게 받더라도 같이 다녔다고 말했다. 돈을 따지지 않고 시간이 되면 함께 몰려 다니는 것이 즐거웠다는 것이다.
『요즘 후배들을 보면 낭만이 없어졌어요. 개그가 영악해졌어요. 돈이 되기 때문이죠. 요즘 가수들은 판을 낼 때 한 곡에 집중하는데 통기타 가수들은 수록된 곡이 다 히트했죠. 한 곡만으로 승부를 보려고 생각하면 안되죠』

楊姬銀씨는 당시에는 끈끈한 정이 있었다고 말한다.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이 청개구리에 모여서 돈 안 받고 노래를 부르다가 대학교 축제에서 오라고 하면 다같이 갔어요. 짜장면 사먹고 버스타고 가서 다른 사람 노래할 때 코러스넣고 반주해주고 그랬죠. 노래를 돈주고 사는 풍토가 아니었어요. 서로 니가 부르는 게 좋은 것 같다며 좋은 노래를 남에게 권했죠. 뒤돌아보면 그 시대의 문화가 참 신선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楊姬銀씨는 한대수씨가 작곡한 「행복의 나라로」를 허락도 받지 않고 불렀지만 나중에 만난 한대수씨는 오히려 노래가 많이 알려진 것을 고맙게 여겼다고 한다.
高榮秀씨는 요즘 연예인들을 겹겹이 포장지에 싼 과자에, 당시 연예인들은 소쿠리에 담아놓은 사탕에 비유했다.
尹亨柱씨는 당시의 노래들은 「우리」를 강조했으나 요즘 노래는 「나」만 강조한다고 지적한다.
『음악이 급하고 빨라졌어요. 기다리지를 못해요. 랩을 하다보니 빨리 얘기해야 하고 바빠졌죠. 사랑도 인스탄트적으로 표현하고 쉽게 만나 쉽게 헤어지며 외설적인 가사들이 늘어났습니다. 감정교육이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진실이 담긴 곡이 생명력이 있다는 겁니다』

연극평론가 李英美씨는「묘한 아마추어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통기타 가수)은 우리 대중문화사에서 최초로 기성문화와 맞서는 청년문화의 담당자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대중에서 팔릴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이전과 다른 감각을 발휘할 수 있었고 창의적일 수 있었다」고 당시 문화를 평했다.

문화는 가꾸어야 한다
청년문화의 기수들 가운데 현재 가장 활발한 음악활동을 벌이고 있는 가수는 楊姬銀씨. 음반 발표뿐만 아니라 1993년부터 지금까지 일년에 서너 차례의 공연을 성황리에 열고 있다. '대한민국 아줌마 공식 지정가수'라는 타이틀이 붙은 楊姬銀씨는 자신의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이 1954년생에서 1958년생까지의 아줌마들이 가장 많다고 전한다. 지난 5월5일부터 5월9일까지 한대수씨와 함께 「아주 특별한 만남」이라는 타이틀을 단 콘서트를 열었는데 역시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楊姬銀 씨는 포크송을 「마음속에 고이는 얘기를 우물에서 길어 올려 풀어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노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 대중문화를 정성들여 가꿔야 합니다. 자신이 가꾸지 않으며 자신이 속한 세대의 문화가 사라지게 되죠』
楊姬銀씨는 10대가 판을 치는 TV화면을 보고 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세대의 가수가 음반을 내면 그것을 사서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楊姬銀 콘서트를 계속 기획해온 플래너 대표 안태경 씨는 楊姬銀씨의 예를 봐서 예전에 활동했던 통기타 가수들의 콘서트는 성공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진단한다.
『楊姬銀씨 공연 때마다 반응이 상당히 좋아요. 지금 30-40대들을 마땅히 수용할 공연문화가 없습니다. 중년을 겨냥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요』

지난 5월 6일 미사리에 있는 카페 록시를 찾았다. 록시에 도착하기 전 몇십군데의 카페를 지나쳤는데 카페마다 들으면 알만한 통기타 가수들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3년 전부터 이런 까페가 성업 중인데 자동차를 보유한 바쁜 중년들이 잠깐 시간을 내서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록시는 宋昌植씨가 출연하는 곳이다. 밤 11시에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2층과 3층의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꽉 찼다. 관객층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으며 자녀를 데리고 온 부부가 특히 많았다. 宋昌植씨는 관객들의 신청곡 중심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30분간의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에 '고래사냥'을 열창할 때 전 관객이 혼연일체가 되어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사인을 받으며 열렬한 팬임을 강조했다. 취재에 응했던 통기타 가수들이 트윈폴리오의 아름다운 음색이 대중의 관심을 통기타에 끌어당긴 효시라고 얘기했건만 宋昌植 씨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청년문화는 이슈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청년문화를 유리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했겠죠. 1973년에 군에 입대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트윈폴리오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객관적으로 내 노래를 들어보니 내가 굉장히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때까지 나름대로 한국사람의 음악이 있었는데 트윈폴리오가 한국사람의 음악을 잊어먹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종전에 없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국포크음악 30주년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강헌 씨는 지난 4월과 5월에 열린 공연이 성황리에 마친 데다 후원인 모집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공연과 기념사업이 순조롭게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1970-1980년도는 포크음악이 주류음악으로 대중음악계가 풍요로웠으나 1990년도에 포크음악이 저조하면서 10대 문화가 매체를 독점하게 되었다면서 추억을 되살리자는 의미가 아니라 황폐화된 대중음악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기 위해 포크 음악의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대와 40대 후반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이 융성해야 10대와 균형을 맞출 수 있고 또 한 두 번의 이벤트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지속적인 사업을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헌 씨는 통기타 음악이 풍성해져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통키타 음악은 영원한 비판적 지성의 음악이면서 자본과 매체에 기대지 않고 홀로 서려는 예술가 정신의 음악입니다. 따라서 포크 음악 전성기는 끝난 것이 아니냐는 비관적인 관측은 피상적인 우문에 불과하죠. 인간의 목소리와 왜곡되지 않은 자연음향에 바탕한 이 음악의 정신이 죽을 때 포크 음악은 사멸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아마도 인류 모든 대중음악의 소실점이 될 것입니다』

서태지가 아이들 문화로 세대교체
취재를 하면서 만난 통기타 가수들은 통기타 문화 이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로 1992년에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을 꼽았다. 장년문화를 청년문화로 바꾼 그들은 자신들의 '청년문화'가 서태지로 인해 '아이들 문화'로 세대 교체되었다고 진단했다. 서태지를 천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서태지의 천재성은 음악적 재주와 함께 가요에 마케팅 개념을 도입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통기타와 서태지 사이에 조용필이라는 거장이 있었지만 조용필은 여러 장르를 두루 수용했을 뿐 음악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에 등장한 댄스 가수들에 대한 통기타 가수들의 평은 대체로 관대했다. 자신들이 많은 질타를 받으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했기 때문인지 옹호하는 분위기였다. 뮤직네트워크 趙鏞浩 전무는 요즘 10대 위주의 음악에 대해 비판이 많지만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10대들에 분출구가 있어야 하며 어쨌든 10대를 겨냥한 판은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나이든 사람의 잣대로 젊은이들의 변화무쌍한 느낌과 생각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통기타 세대가 나왔을 때도 지금처럼 비판이 많았죠. 어느 시대든 젊은이들의 우상은 있는 겁니다』

청년문화의 기수들은 이제 그들이 지금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던 기성세대가 되었다. 趙英南씨는 사회자와 가수로, 이상벽 씨는 TV 사회자로 활동하고 있다. 全裕成씨는 개그 1세대로서 후배들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高榮秀, 徐酉錫씨는 라디오 방송 진행자로 성가를 높이고 있다. 최근까지 라디오 DJ로 활동한 楊姬銀씨는 음반 발표와 콘서트로 왕성한 음악활동을 하고 있으며 金敏基씨는 음악이 아닌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만드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尹亨柱씨는 광고회사를 운영하며 1천4백곡의 CM송을 발표했고 김세환 씨는 간간이 방송무대에 서고 있다. 李章熙씨는 LA라디오 코리아를 운영하고 있으며 宋昌植씨는 KBS 열린음악회를 비롯한 대형 무대에 주로 서고 있다.
문학, 영화, 미술 등 여러 분야의 청년문화 기수들은 그 분야의 중견으로서 탄탄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

趙英南씨는 당시 통기타 세대들이 건국이래 가요사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며 「30년간 명맥이 이어지는 가수군이 있는가」 반문했다. 당시 인기있는 친구가 너무 많아서 스스로가 인기가수였는지도 몰랐을 정도였다면서 대부분 우수한 인재들이었다고 평했다. 宋昌植씨는 대개 20년마다 우수한 인재들이 나오게 되어있는데 60년대 후반이 바로 그때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趙鏞浩씨는 70년도에 대단히 좋은 가수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좋은 가요가 많이 나왔다고 평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도 그런 경향이 있다고 한다. 다만 외국은 락스타일의 노래가 번성한 대신 우리 나라는 통기타 그룹이 번성한 점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락음악은 저항의 음악인데 유신시대에 많은 제약을 받아 락음악이 번성하지 못한 것이라고 봅니다』
趙鏞浩씨는 1970년대 통기타 가수들이 생명력을 유지한 이유는 각자가 가수로서의 개성이 있는 데다 가창력과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또 만들어진 가수가 아니라 라이브 무대에서 실력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청년문화 기수들은 자신들의 문화의 흐름을 바꾼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화가 鄭江子씨는 누군가는 했어야 했던 일을 자신들이 한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요즘 미술계에 새로운 태동이 별로 없다며 항상 청년문화가 살아 움직여야 한다고 우려했다.
제4집단을 이끌었던 화가 金丘林씨는 가끔 자신이 청년문화의 기수에 거론될 때면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당시처럼 큰 덩어리로 운동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며 당시 운동이 한국 문화계의 주축이 되었으며 오늘날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흡족해 했다.
趙英南씨는 여한이 없다며 생각지도 못했던 문화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尹亨柱씨는 의사가 되지 않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고 말했다.

청년문화, 그 이름만으로도 상쾌하다. 그동안 우리가 자주 들어온 문화라면 단연 군사문화와 시위문화가 아닐까 싶다. 해방 이후 급속한 사회발전과 정치적 격변 때문에 제대로 문화를 가꿀 수 없었던 우리들이 푸르름을 간직한 청년문화를 회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지금, 많은 사람들은 더욱 짙푸른 청년문화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초로에 접어든 청년문화의 기수를 찾아서

월간조선  1999. 07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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