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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진이 타계한 지 올해가3년째이다.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강국진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고 3주기 추모 전을 꾸몄다. 70년대 작품들에서 작고 직전의 92년 작품까지 일당에 모아졌다.

강국진의 작가적 편력은 대체로 4개의 시기로 구획해볼 수 있다. 1965년 <논꼴동인>의 출범에서 67, 68년 청년작가연립회로 이어지는 60년대 후반을 제1기로 본다면, 오브제 중심의 작품을 시도했던 70년대 전반기를 제2기로 설정해 볼 수 있다.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중반경까지 주로 섬세한 선조에 의한 전면화의 경향을 제3기로 묶어볼 수 있고, 80년대 중반에서 작고 시까지의 이미지와 즉흥성을 혼유 시켰던 경향이 제 4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짧은 생애를 통한 작가적 편력은 크게는 한국 현대미술의 공시적 문맥에 그대로 적…………술의 진로에 깊숙이 뛰어든 적도 있었고 약간 벗어난 입지에서 공감대를 형성해준 때도 있었다. 현대미술의 진로에 뛰어든 초기의 경향이 그만큼 과격하고 직접적이었다면, 실험적 추세에서 약간 비껴난 시점에선 자기세계의 심화와 현대미술의 정체성이란 문제에 자신을 투자했음을 엿볼 수 있다.

제 1기에 해당되는 청년시대 강국진의 이미지는 재스쳐가 앞서는 격정적인 표현의 세계에다 화면을 벗어난 행동하는 예술가로서의 해프너로 굳어져 있는 편이다. 그가 참여한 최초의 그룹<논꼴동인>은 추상표현주의의 만연이 가져온 미술계의 숨막히는 분위기에서 이탈하려는 젊은 열기들이었지만, 여전히 이들의 화면 표정도 추상표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60년대 중반에 등단한 <논꼴동인>과 그 주변의 세대가 추상표현주의의 마지막 세대라는 에피세트를 부여하는 데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세대에 의해 현상이 타개되고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는 점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유산에서 과감히 뛰쳐나온 혁신자로서의 이미지에 값하기도 한다.

1967년에 결성되어 당시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열렸던 <청년작가연립전>은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다양한 실험을 종합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강국진을 중심으로 신진동인들이 출품했던 작품성향은 오브제와 오늘날의 개념으로 설치계통의 환경작품들로 특징 지어졌다.

< 청년작가연립전>은 전시공간에서 뛰쳐나와 행동하는 의식으로 자신들의 방법을 개진하여 주었는데, 잇따른 시위와 해프닝이 그것이다.

강국진은 수 차례에 걸친 해프닝에 직접 구성과 실연으로 참여하였다. 이 무렵의 해프닝은 단순한 행위의 발전적 문맥으로 보다 사회비판적, 문명 비관적 색채를 강하게 띰으로써 한국적 상황의 독특한 산물로 간주되었다.

70년대 강국진의 작품경향은 오브제가 중심을 이루었다. 강한 환경적 요소를 띠었던 <청년작가연립전> 출품작에 그대로 맥락 된 것이었다. 이번 전시엔 이 계통의 작품이 거의 출품되지 못한 애석함이 있으나 사진도판으로나마 당시 작품의 성향과 이를 통한 작가의 의식을 충분히 추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강국진이 다시 타블로로 돌아온 것은 제3기에 해당되는 70년대 중반기이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대부분 3기의 것과 마지막으로 분류된 4기 것이다.

제3기의 회화작품은 선조에 의한 전면화로 특징 지어 볼 수 있다. 섬세하게 흐르는 선조들이 빽빽이 화면을 누비는 계열이다. 그는 이 계통의 작품들을 <가락>이란 명제로 시리즈화하고 있다. 가락이란 리듬을 이름인데 일정한 반복의 유형을 은유화 해주고 있다. 가늘게 분할된 선조들이 화면을 덮어가는, 이 전면화 또는 단색화 경향은 당시 한국미술의 일각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모노크롬의 추세와 간접적 연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방법의 모색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시대적 공감대와 아울러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80년대 중반에 와선, 선조의 바탕에 중첩되는 삼각 띠나 또는 그에 유사한 쌓여 올라가는 형상이 은은히 베어 나오게 처리함으로써 더욱 풍부한 표정을 시도하고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 초까지의 제4기에 해당되는 시대로의 전환적 기미로 파악된다.

제4기의 작품은 <역사의 빛>이란 시리즈로 큰 맥을 이루고 있다. <가락>이니 <역사의 빛>이 다같이 고유한 미의식에의 나름의 표상을 기도했음을 시사하고 있는 듯하다. <역사의 빛>은 더욱 구체적인 실천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밝고 경쾌한 맛을 준다는 인상이 재배적이다. 대단한 절제가 요청되었던 <가락>연작에선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호쾌한 기운이 화면을 누비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붓자국은 보다 분방하고 색조는 화사한 톤으로 얼룩진다. 또한 이 시기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기본적 구성은 화면의 분절이다. 좌우로 이등분한 화면이 한쪽은 추상적, 표현적인 흔적들로 채워지는가 하면, 다른 한쪽은 보다 구체적인 상형으로 등장한다. 토우 물고기 불상 수석 새 등의 이미지들이 간단없이 출현한다. 그것도 현실의 그것이기 보다는 민화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있다. 선열한 색채들의 어우러짐과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민화적 이미지의 융화는 그의 조형적 관심을 적절히 표명해주고 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기세계로의 자신을 획득해가는 무렵에 닥쳐왔다는 점이다.

역사의 빛을 찾아서 *

월간미술  1995. 11.01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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