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angja Hwang
My dear husband!
I am preparing for your show alongside your close aides while not being fully able to accept your absence.
I cannot seem to let go of all the memories associated with your pieces, memorabilia, our house that you built, garden stuff, Kumdan Mountain and the landscape we used to behold, in both my eyes and heart. Anything that I see around, even the three puppies ? each named Mapsie, Mapsina and Bori - have gone through your graceful touch, and yet you have left all these behind. That is to go where and do what? Does all your love for me for 17 years come down to this point so cruelly?
Early our marriage I was asked by a reporter for monthly magazine, Jubu Saenghwal (Mistress Life), writing a segment titled “Weekend getaway of sentimental-moody couple”, how I would examine a mark on you. I gave 110 out of 100 without hesitation. The full score seemed not quite enough to suffice your endless bestowing.
The first day of meeting was more about me talking and you listening, rather than anything else. Yet, the moment I fell in love with you was looking at you giving ear to me, not saying much apart from answering. My love never stopped since. You never resorted to raising voice despite the fact that I was immature, having been the youngest of the siblings. If I spoiled something or commit wrongly, it was normal to expect no particular words from your mouth.
“Dear, do you ever get so angry?” I care to ask. You would respond “Should parents show their anger to children?” imitating your disciplining move. I was always a kid to you. I, on the other hand, was not so much of a good spouse, or dignified; just sorry. But yes, we made a great couple, never weary of each other.
My beloved dear!
You loved life.
With hardship while in hardship, and with goodness while the life was favorable. You gave your bit and were happy for what you had. I never saw indolence or intemperance in you. You always had that neatness in decency, sorting what to be done and not, and what to say and not, just like the old saying “verbum sat sapient”.
Whatever you were committed to, you were not in a hurry. And it was in your habit to say that successfulness mature late; based on your philosophy that much too quick development can jeopardize the root.
I remember being so distressed for you being seemingly indifferent and unconcerned about the world, abandoning all secularity for your work. But I could notice your courage that held your own choice and standard robust, an attribute that I truly admired.
You once talked about others designating your works to be too diverse, complaining “an artist cannot maintain status quo forever, which means a truly satisfying outcome, can never come about unless one tries to put new things on trial consistently. I see many artists in their 30s and 40s claiming with unfounded confidence that they have found what is really intrinsically theirs, and I get sad by it”. You did the exactly opposite to them; always in search of some mode, technique and emotion.
You did things by doing, not speaking about them. Your deeds mostly went unnoticed: things in fault or out or order were fixed outright; grass was suddenly shorter as you mowed them while I wasn’t around. One memorable instance was when you bought new dyestuff and canvases to remind me of my lax commitment. I now let you know that I sometimes found it hard to concentrate on painting, because I just loved spending time with you.
I accompanied you to a lot of places. As I leave for work in the morning or after lectures, you tended to ask where we should go together. Pub, exhibition malls, cinema etc. You even brought me to your office as if I was your guest, made me coffee. How about your school excursion trip where you stayed composed and calm as if I was one of the students among whom I felt so awkward. I recall that I told I would refuse to follow you to such trip, and you felt bad leaving me behind, and alternatively sending me down to Haenam so that we can meet up on our way back to Seoul. How did you leave me so suddenly, to allow my own time for painting?
You were my best friend, lover and guardian. Where could you be right now?
My dear, my beloved husband!
The last movie we went to was “Ghost”. You may be gone, but your utmost love stays. And it still drives me, and I assure you that your love will keep on blossoming through your work left behind with us.
It is still vivid in my head that we used to discuss Buddhist belief of the cycle of reincarnation, always concluding what we shall meet and share love again next life. I await that reunion for as long as it takes.
My dear, I shall meet thee again.
Yangja Hwang, Kukjin Kang (Printpia: Seoul, Korea, 1995, pp. 270-271)
Memoirs
황양자 (아내, 화가)
여보야!
당신 안 계시는 현실을 아직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당신이 아끼고 사랑하셨던 분들과 함께 당신의 전람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당신의 모습이 나의 눈과 가슴 속에 선명하고, 당신의 작품, 사용하시던 물건들, 당신이 설계해서 지은 우리집, 정원의 나무와 풀, 검단산과 주변의 풍경들. 우리의 가족인 맵시, 맵시나, 보리(강아지들),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손길과 눈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당신 그렇게 훌쩍 떠나시려고 17년 세월에 나에게 그 많은 사랑을 베푸셨습니까?
결혼 초 월간지 『주부생활』의 '무드파 부부의 주말여행'란에서 남편의 점수를 물었죠. 나는 망설이지 않고 굳이 점수를 매긴다면 110점이라고 말했습니다. 100점의 점수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나에게 베푸는 그 이해와 사랑의 점수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였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당신을 앞에 두고 나는 끝 없이 많은 말을 하였죠. 아주 가끔 말 대답을 하면서 조용히 들어주시던 당신의 모습이 마치 천년을 가도 움직이지 않을 바위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하였고 한번도 당신에 대한 사랑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막내로 자라서 정신적인 면이 덜 성장한 것 같은 저에게 변함없는 이해와 사랑으로 나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셨고 언성 한번 높이지 않으셨죠. 내가 잘못을 저질러 놓았는데도 당신은 아무 말도 않으셨습니다.
"여보야. 화 안나?" 하고 물으면 "애들 데리고 어른이 화 내니?"하면서 내 머리를 때리는 흉내를 내시곤 하셨지요. 당신에게 나는 항상 어린애였죠. 한번도 의젓한 부인이 되어 드리지 못했고 또 좋은 부인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에게 늘 끝없이 죄송한 마음뿐 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좋은 부부였지요. 한가롭게 권태기를 겪을 시간이 없었나 봅니다.
여보야!
당신 정말 삶을 사랑하셨죠.
어려울 땐 어려운대로, 좋을 때는 좋은 대로 당신은 삶을 사랑 하셨고 행복해 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게으름을 본 적이 없고 무절제함이나 과함을 본적이 없습니다. 항시 단정하시고 해야될 일과 안해야될 일, 해야될 말과 안해야될 말을 구별하셨죠. 강요함 없이 개개인을 존중하여서 편하게 하여주셨고 상대편의 마음을 끝까지 조용하게 들어주고 한마디 말을 하면 족하였습니다.
당신은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무리함이나 서두름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대기만성이란 말을 즐겨 쓰셨지요. 너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은 뿌리가 든든하지 못하여 죽기 쉽다면서
주변에서 무어라 하든 조용하게 작업만 하시던 당신을 보면서 세상 흐름에 무관심하던 당신을 보면서 속상해 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세운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당신의 의지와 용기를 보면서 당신을 존경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이 당신께 작품의 성격이 너무 다양하다는 말을 하곤 하면 집에 와서 당신은 저에게 말씀하셨죠. "작가는 머무를 수가 없어. 끝 없이 방법을 모색하고 실험을 하여 정말 이것이다라는 좋은 작품이 나올 때 까지는 작품 하는 과정에서 찾고 또 찾아 헤맬 수 밖에 없어. 요즘 30-40대에 내 것이라 감히 말하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은 슬퍼진다." 하셨죠. 당신은 해프닝, 입체, 판화, '선'에서 '역사의 빛'까지 다양한 작업과정을 거치면서 끝없이 방법을 모색하셨지요.
신은 말보다 행동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셨습니다. 언제 하셨는지 모르게 고장난 것이 고쳐져 있고, 길게 자란 잔디는 짧게 잘라져 있곤 하였죠. 어느 날인가 2층 내 화실에 가보면 새 물감과 새 캔버스가 놓여 있기도 하였죠. 그림을 안 그리고 게으름을 피는 나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셨는데 저는 정말 그림을 그리기 싫었습니다. 당신과 지내는 시간이 더 좋았기에…
저 정말 당신을 많이 따라 다녔지요. 아침 출근 길에 아니면 강의가 끝난 후에 나에게 "오늘은 어디 어디 가는데…"하시면 나와서 만나자는 말씀을 자주 하셨죠. 가능하면 어디든 저를 데리고 다니시려 했던 당신이기에 우린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지요. 술집, 전람회장, 극장, 음악회, 어떤 때는 교수실로 저를 데리고 가서 내가 손님인 양 커피를 타주곤 하셨지요. 많은 곳을 같이 여행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수학여행까지 데리고 갔었죠. 제자들의 눈치가 보여 저는 부끄러웠는데 당신은 제가 학생인양 태연하셨지요. 또 수학여행 만은 안 따라가겠다고 하니깐 저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저를 해남을 보내셨지요. 당신 오실 때 맞춰 올라오라 하시면서. 당신은 이제 저한테 그림만 그리라고 그렇게 혼자 먼 길을 가셨습니까?
나의 친구였으며 애인이었으며 보호자였던 당신,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모든 사랑과 나의 사랑을 뒤에 두고 당신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보야! 사랑하는 나의 여보야!
우리 둘이 마지막 본 영화가 '사랑과 영혼이' 이었죠. 나에게는 당신의 지극한 사랑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당신이 베풀어 주시던 사랑 속에서 내가 살아가고, 당신 또한 당신이 아끼던 사람들, 그리고 당신의 작품을 통해서 영원히 피워날 것입니다.
우리 가끔 불교의 윤회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도 부부로 만나 사랑하면서 살아가자고 약속했었죠. 천만년 세월이 흐른 후에라도 우린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다림이 지금도 제게는 있습니다.
여보야! 사랑하는 나의 여보야! 우리 다시 만나요.
Artist Kukjin Kang
Awaiting our reunion... (1995)
Kukjin Kang, with his wife, Yangja Whang
우리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1995)
KUKJIN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