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kahn Kang
My brother! One that I will never be able to call for!
What took you away so suddenly, not leaving a single farewell word?
Admittedly you were one of the quietest, but how could you?
I only shout out your name in the void air.
It was the most horrible experience to take train to Seoul after hearing about your dire condition at hospital.
And what awaits me at the compartment?
The room was so coldly tidied up. You became history, part of our dark ancestry. We could not hold ourselves together as we saw you put to rest in the mortuary.
I happen to remember you more as a desperate painter than in consanguinity. Nor a good singer, listener and talker, socializer, but a person with genuine love towards others, destined by God to love art.
You never talked too much, as fitting to your history that parents used to give mild beats so as to make sure that you didn’t go permanently mute: one hard to get close to, but also with perseverance, social duty and faithfulness.
The point that you got into stride for art was probably the moment you entered middle school, rather than your primary school where you participated in various art events. The time when you got your first easel was when I saw you were truly satisfied.
I also remember seeing your water color landscape painting of a temple precinct and thinking it was profound. I never felt so comfortable thinking you must be going through hardship having to make money for your performance art endeavor amid desolate 60s. It is now apparent to me that you could bear all that because of friendship that kept you thinking and under control, the companions who were there to discuss issues.
Among them are now no longer with us, just as you have left for haven. I call out your name in vain. 54 is the age of endless possibility, and how did you possibly cover up your entire undesirable remnant to leave us with ravages and sadness?
A Loved one could depart for the West to get to the West, but how about a person who ailed all along to dissipate in falling leaves, to meet on mountain?
One who is deeply saddened shall wipe your memory with hem to express the nature of evanescence on a canvas.
Yangja Hwang, Kukjin Kang (Printpia: Seoul, Korea, 1995, p. 272)
Memoirs
강국안 (동생)
이제는 부르지도 못할 나의 형님, 국진 형!
무엇이 그리 급해 황급히 떠나셨습니까?
남겨진 우리들에게 작별 인사 한 마디 없이 그렇게 훌훌이 떠나셔야만 했습니까.
형님은 본시 말이 없으셨기에 짐작은 합니다만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를 끝내 하시지 못하고 가셔야만 했습니다.
이제 허공을 불러 볼 형님의 이름이여!
기억하기도 싫은 92년 3월 1 일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상경하는 마음은 왜 그리 불안한지…
메디컬 센터 입원실로 들어섰을 때 이게 웬 일입니까?
계셔야 할 형님은 간 곳 없고 차갑게 정리된 병실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영안실로 찾아 간 우리들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비탄과 설움에 몸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과거사로 어두운 가족사의 한 페이지일 뿐입니다.
사실 피를 나눈 형제로서가 아니라 형님은 그림 아니면 못살것 같았던 분으로 기억 됩니다. 노래를 잘 하시나, 말을 잘 하시나, 사교성이 좋으시나, 착하디 착한 형님은 참으로 하느님이 그림으로 잘 선택해 주셨다고 믿어 왔습니다.
형님은 4살까지 말이 없어 벙어리인 줄 알고 때려 울려 보았다는 어머님의 말씀처럼 입이 무거우셨습니다. 처음 사귀기가 무척 힘이 드나 친해지고서는 깊은 정이 많으셨고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끈기와 의리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국민학교 때 학교 대표로 사생대회에 나간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그림수업 시작은 중학교 미술반에 들어가고 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목수에게 부탁해서 이젤을 찾았을 때 어떻게나 대견해 하시는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중학교 때 어느 날 학교 갔다오니 저희들 방 책상 위 벽에 수채화로 어느 절풍경을 그려 놓은 것을 보고 참으로 좋은 그림이다 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60년대 말 행위예술을 하시던 어려운 시절 예술가의 삶이 너무 춥고 배고파 보였기에 형님이 참으로 어려운 선택을 하시지 않았나 안스러워 한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밤 새도록 소주를 기울이며 인생을 논하고 예술을 논할 수 있었던 훌륭한 화우가 있었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가고 없는 분도 계시고 형님 또한 홀연히 사라지시어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한창인 오십 넷, 옛날 그 설움 어떻게 덮으시고, 남은 세월 빛나는 삶 한자락 바람되어 이렇게도 할퀴고 떠나셨습니까.
가는 님이야 서(西)녘으로 서(西)녘으로 가면 되지만 남은 중생 몰래 홀로 앓다가 가을 낙엽이되어 흩어지면 언제 어느 강산에서 또 만날 수 있으리오.
먼저 가신 형님 자죽 눈물 자락으로 훔치어 인생 무상함을 화폭에나 담아 볼꺼나.
Missing deer brother (1995)
형님을 그리며 (1995)
KUKJIN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