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irs
김한(화가)
강국진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짐 챙길 겨를 없이 그렇게 황망히 우리 곁을 떠난 지 어언 세 해가 되는가?
1992년 3월 1일. 오전 7시경 강국진 교수가 위독하다며 울먹이는 후학 김선의 전화는 입원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농담 같은 것이었다.
탈 없던 자동차가 어느 날 갑자기 고장 나듯 강국진도 가벼운 마음으로 메디컬 센터에 입원 하였던 것인데...
뜻밖에도 너무나 갑자기, 주위의 인연들이 아연 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하늘은 훌쩍 그를 데리고 가 버렸다.
심근경색 아직도 믿기지 않은 그의 죽음은 그를 아끼던 주위 사람들에게 인생과 운명의 엄숙함을 새삼 일깨워 주는 "것" 이었다.
강국진은 우직하고 강직한 반면 포용력 있는 차우였다. 자신의 일에 충실했으며 결코 인생을 성급하게 살지 않았다. 불의와 타협하는 일이 없었으며 더러운 것을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떤 글에다 그를 비겨 "바위"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정말 바위처럼 그의 자리에서 끄덕 않고 믿음직한 삶을 살았다. 그는 실험정신이 강한 작가(1967 청년작가연립전)였고 항상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자세로 작업에 임했다.
70년대에 그는 나와 '서울 방법전'(1977)을 만들어 모노톤의 미니멀류만 득세하던 우리 화단에 다양성의 공존을 말없이 실천하여 미술의 폭을 넓히는데 공헌하였고 이 일은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 어떤 특정집단의 화단 횡포가 극에 달했던 '80년에는 마침내 그들을 미술협회에서 몰아내는 강직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생전의 그의 자세가 후학들(목원대학교, 추계예술학교, 한성대학교)에게 많은 감화와 영향을 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 생활이 좀 안정 될 만하고 지금껏 힘써 "일"한 것들을 거두어 들일 지천명의 나이 54세에 그는 아깝게 가 버린 것이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불가에서는 모든 것이 "공(空)"으로 돌아간다 했으나, 우리는 안다. 생전에 그가 인연들의 가슴 속에 각인되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또한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것임을.
여기 그를 잊지 못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들이 모여 그가 누워있는 모란 공원 전시장에서 3주기를 맞아 그를 기리는 조촐한 그림 잔치를 마련하였다. 만일에 내 젊을 때 읽었던 글처럼 "자신이 세상에 사라진 후에도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것에 화가 난다. "고 강국진이 생각한다면 이 그림잔치가 그의 영혼에 다소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이들이 그의 생전의 뜻대로 좋은 그림을 그리고 훌륭하게 산다면 저 세상에서도 외롭지 않으리라.
강국진의 명복을 빌고 인생의 마지막 통과의례를 생각하는 자리에서 문득 이런 문구가 우리를 상념에 젖게 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말은 불 속에 들고 그 호흡은 바람 속에, 그 눈은 태양 속에, 그 뜻은 달 속에, 귀는 공간에, 몸은 대지에 들고, 그 자아(영혼)는 하늘에 들고, 그 털은 풀, 머리 털은 수목, 피는 물속에 흡수되니 그 인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인도의 우파니샤드)
이 그림잔치의, 장을 만들어 주신 모란미술관 이연수 관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Han Kim (painter)
Kang, no longer belonging to this worldIt is still hard to believe he has left us, yet it’s been three years?March 1st 1992 was unforgettable; I never knew about his hospitalization, and receiving an urgent phone call from Sun Kim, one of his students, was the most difficult one, and it even sounded like a joke at first.It must have been like a car going wrong after no particular problem in the past, yet it was the last move that he made.
He left all of us so suddenly, leaving us no chance even to be stunned. Cardiac infarction was something that enabled us to realize the gravitas of destiny.
In my memory, Kang was tolerant, strong with opinions. He was never impetuous or hasty. I once referred him to a rock, and rightfully: he never compromised and always stood robust for and in his belief. Many remember “Chungnyun jakka yeunlipjun” (1967) in which he displayed his utmost desire to promote and experiment new forms of art.
He and I, by organizing ‘Seoul Bangbub Jun’ (1977), made a quiet endeavor to facilitate and spread our realm of understanding of art world, which at the time was restricted to monotone and minimalist paintings. The endeavor still has recognizable resonance to this day. He even successfully drove out the most deceitful political forces out of hand in the 80s. All of his effort and achievements were more than an inspiration for his students at Hansung University, Mokwon University and Chugye University. The time was about to be not so hostile any more, and he passed away at the point where he started seeing the dawn of comfortable future, his age 54.
Where could he possibly be now?As the Buddhist teaching goes, everything is set to return to void. But in spite of it, we know that the memory lives on to remind us of his deeds and lessons.
Here we have gathered people who can never let him go have decided to open a series of exhibitions to a pay small tribute, our third anniversary. As one phrase stuck in my memory tells “if things must go around even after my death, totally negligent of my death and absence, I would be one angry soul”, I imagine him to be a little relieved in anger if he thought the same in his soul and saw this exhibition opening. I also imagine he would be a lot happier where he is if he saw us living his ideal to give true expressions of our utmost value.
As we pray for the repose of his soul, it is as if we are almost soaked in the Upanishad’s notion that:
“as human beings pass away, his words come under fire, breaths in wind, eyes in the Sun, the meanings in the Moon, ears in a space, the body in the earth, the self in the heaven, fur in forest, hair in water. Just where can we find this man?”
We offer our special thanks to Yunsoo Lee, the director of Moran gallery for providing us with this opportunity to open the exhibition.
Yangja Hwang, Kukjin Kang (Printpia: Seoul, Korea, 1995, p. 275)
Upon opening the 3rd anniversary exhibition in memory of Kukjin Kang
강국진 3주기 추모전을 열면서 (1995)
KUKJIN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