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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a Ryu (painter)

 

 

The obituary notice came like a punch in the face, leaving me standing frozen.‘I must have misheard. A man as healthy as he was…’But the reality was there to be accepted. I quickly headed to the mortuary to meet his wife Hwang in weeds, crying. As she cooled down a little while later, she began telling the story. ‘we checked in this hospital to get a general checkup of his health, and visitors like Taeshin Choi who is from the same college class had a chat and laughter. All this was only moments before the tragedy, and after Choi and his wife left, I put a peeled piece of apple into his mouth. He chewed several times and upon swallowing it, his breathing was hampered. Then…’ He died of cardiacinfarction.

 

I couldn’t say anything, only offer my presence and the emotion of condolences. I found my instinct struggling to show tears, even making me a little embarrassed. Perhaps it was out of my dried up pool of sentiment after seeing my husband die after 3 years of suffering from sickness, holding my five senses still in front of his grave. My elder sister, who was there at the mortuary with me, could not remain indifferent any longer about my lacking of emotional resources. “How could you not show your tears? I will do your job on top of mine!” Then she cried a hell out of herself.

 

Time really flies by. It’s been three years since he passed away, and people started gathering up to organize the posthumous exhibition, and build a painting book for which I was called up to contribute. I have never been a good writer, barely managing to pick up a pen upon my decision to contribute.

 

Kang and I are from the same class of graduation. I read oriental art whereas he did western. I had to pass his practice chamber on my way to mine, and we constantly bumped into each other in lectures. The background view of a small hill that we had from our chamber was of many kind and description of beauty throughout the year, changing from season to season. We could enjoy the golden bells, azaleas during Spring, all the unsorted multifarious work of nature in Summer, and asters, reeds and a wave of cosmoses forming a multicolored scene of glorious surge of beauty for Autumn.

 

Hence it was only natural for the students to go out by twos and threes, somewhat boisterous as well. Kang was out there often with his friends, but I remember seeing him sitting there not talking much, just listening. When I joined the lot, I had to approach him first to get a glimpse of response from him. I wasn’t such a close friend to him until years later.

 

One day my husband seemed abashed leaving the house, saying that he was being the wedding officiator for the first time. He told me that he would feel more nervous in my presence, but I insisted going anyway. The venue was at ‘Rotary Wedding Hall’, and I was sitting at the back, watching and listening close. As the bridegroom entered, I could not believe my eyes: Kang was walking the aisle and he looked ever so handsome in his wedding suit. As for my husband, he was a little clumsy at times, but a good job for a first timer.

 

So after our graduation, we happened to stay close and maintain a cordial relationship with our spouses. Kang used to be a student taught dessin at the late Kwan Nam’s place by Indoo Ha . Both as junior and senior student, and sometimes as a colleague, he dedicated himself to improve his knowledge and skills, especially after the hospitalization of Ha leaving behind entrusting numerous tasks to Kang. Kang as I remember him had pointy eyes, dark skin and preferred gray trench coat and his berets. He in fact had quite a number of berets and other types of hats, and his choice changed seasonally and depending on place of meeting etc. He was in many ways a man with a good fashion sense.

 

He also had a handful nicknames amongst his graduate friends who called him Kukjin Bro, comfortable man, bear-like, orange peel, a man with a warm heart etc. A person unfamiliar with him may say he is a little too stubborn in opinion and perhaps cold-hearted, but I am confident that he was a sensitive, tranquility-loving, and lovable professor who for instance voluntarily carried students’ luggage during a trip to countrysides, or offered tea and turned on classical music for his visitors.

 

There were countless number of outing with Kang, most of which took placein photo album in Insadong, auntie’s place, or Seokgulam in Donamdong for drinking. There are also coffee places such as Doraji, Sarubeea. I sometimes joined in for a chat, and as the gentlemen got tipsy, they tended to sing their own favorite songs: Jaegyu Kim sang ‘stonewall path’, Sangsub Jang ‘Black gloves’, Indoo Ha ‘Soft pink skirt’, and Kang ‘About to draw up a circle…’ and ‘The visage’. Kang’s wife Hwang chose ‘Wild chrysanthemum’, making me moved to tears.

 

He was very fond of animals, especially dogs. He decided to take a dog named Bori in 1985, and kept him close by until his death. Bori, as it turned out, abolished all eatings and cried at a corner for days after Kang passed away.

 

I feel like I owe him tons of apologies for not doing so much compared to all the merciful things he gave us. Take the funeral of Indoo Ha and the managerial role for raising his cenotaph. The workload was not only substantial, but also strenuous, and Kang took over with no complaints. Considering Hwang living with only Bori with no children in the house, I come to realize how happy I should feel.

 

The pain and sadness seem unfathomable to bear, and the voidness Hwang will have to bear will never be fully retrieved. I cannot be confortable when I think of that situation, because I relied on their help and advice a lot.

 

I could only be thankful to his presence around me, and I felt happy to keep a friend who still cherished the mind of a little boy even at the age of 50-something.

 

The late Kang’s exhibition is to be held from the October 24th to November 6th at Hangaram Arts Museum. Hwang went through a series of hardships to make it all happen. The works of Kang bring on the melancholy in the friend’s heart, hoping to sublimate our affection and memory to strengthen gravity of the exhibition and Kang’s legacy.

 

 

 

July 1995Yangja Hwang, Kukjin Kang (Printpia: Seoul, Korea, 1995, pp. 287-288

 

 

Memoirs

류 민지(화가)

 

 

강국진! 그의 부음을 듣고 난 순간 무엇엔가 호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청히 서 있었다.
'내가 잘 못 들었겠지… 그처럼 건강하던 사람이…'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나는 운전을 할 수가 없어 택시를 잡아타고 메디컬 센터 영안실로 달려갔다. 하얗게 상복을 입고 눈이 퉁퉁 부어있는 부인 황 양자는 나를 보더니 쓰러질 듯 나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한참 만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떠듬떠듬 울먹이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건강 체크하기 위해 이 병원에 입원하여 일주일 되던 날, 한 밤에 방문 온 최태신 선생(대학 동기동창생) 부부와 웃으면서 농담까지 했었는데… 그들이 막 병실을 떠나고, 깍은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주었는데, 씹어 넘기는 순간 숨이 막혀 손을쓸 사이도 없이 그만하고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병명은 '심근경색증'.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동안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병고로 3년이 지나고, 그를 못 내 그리워하고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모여 그의 추모전을 열게 되었고, 그와의 친분이 있었던 분들 중에서 글을 모아 화집에 싣겠다고 벌써부터 글 청탁을 받았으나 원래 글 재주가 없는지라 무척이나 망설이다가 겨우 이제 펜을 들게 되었다.

 

강국진. 그는 나와 대학 동기동창생이다. 나는 동양화과, 그는 성양화과다. 그의 실기실을 지나야 우리 실기실로 갈 수가 있어자주 마주칠 수가 있었고, 강의실에서도 자주 만나곤 했었다. 우리 동양화 실기실은 서양화, 조소 실기실 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뒷 산과 실기실 주변은 사계절 모두 특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봄이면 개나리, 진달래, 철쭉꽃으로, 여름이면 무성한 낙엽송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가을이면 들국화가, 특히 제각기 영롱하고 다채로운 빛깔들을 하늘거리는 몸짓으로 무리져 너울거리는 코스모스꽃과 한없이 넓게 펼쳐져 출렁이는 갈대밭의 어울림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각과 학생들이 이 곳을 찾는 발 길은 끊이지 않았고, 덕분에 우리 실기실 주변은 조용한 날이 없었는데, 강국진 그도 그곳에 자주 나타나곤 했었다. 그런데 그 때도 그는 무표정으로 혼자있거나 친구들과 어울릴때도 무덤덤하니 남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해야만 겨우 입 가에 엷은 웃음이 잠시 스칠 뿐 무뚝뚝했던 그와는 별로 가깝게 지내지 못하였고, 졸업 후에도 한 참을 그와 만날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남편(하인두)은 주례를 서야 한다면서 무척 쑥스러워 하며 집을 나갔다. 처음으로 하는 주례이니 그럴 법도 하였다. 내가 있으면 더 못 할 것 같으니 오지 말라 당부하는 것을 굳이 따라갔다. 결혼식장은 신촌에 있는 '로터리예식장' 두시자리에 자리를 잡고 마음 조이며 앉아 있었다. "신랑 입장" 하는데 난 내 눈을 의심했다. 검붉고 깡마른 강국진이 아닌 말쑥하고 멋있는 모습의 신랑 강국진이 아닌가! 주례사는 처음 몇 번 더듬거려 내 마음을 조이게 하면서 하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지만, 그런데로 첫 주례사 치곤 재미가 있고 여유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졸업 후 다시 그를 보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린 자주 만나게 되었다.

 

대학 입시를 앞 둔 학생으로 흑석동에 있었던 작고하신 남관선생님 화실에서 하인두선생에게 뎃생 지도를 받은 사제지간이기도 한 그는 한성대학에서는 같은 길을 걷는 선후배로서, 또는 동료로서 생활을 하다가 87년 봄부터 하인두선생이 불치의 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자 그는 정말로 헌신적으로 학교 일과 밖의 모든 일을 말없이 도맡아 처리하곤 했었다. 눈이 적은 편이고, 울퉁불퉁한 검붉은 얼굴에 회색 바바리코트(허리밸트가 있는)에 베레모를 잘 쓰고 다녔던 것 같다. 그는 베레모만 잘 쓴것이 아니고 계절과 장소에 따라 여러가지 모자가 등장하는데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조끼며 가죽구두 흰색 옷, 빨간 머플러 등이 잘 어울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멋스러운 남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졸업생들 간에 별명은 국진 오빠, 편안한 남자, 곰, 미깡 껍질, 가슴이 따듯한 남자, 자상하고 인자한 남자 등으로 이름지어 있었던 것처럼 그는 겉보기엔 말이 어눌하고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뚱하니 앉아 있는 무뚝뚝하고 황소 고집 처럼 보이지만, 그가 학생들과 여행 할 때는 자상하고 짐도 챙겨 줄 정도로 격의 없이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끔 어쩌다가 그의 교수 연구실에 들릴 것 같으면 정리정돈이 깔금이 잘 되어 있고 클래식음악을 조용히 틀어놓고 분위기 있는 차를 대접할 줄 아는 그는 매사가 분명하고 섬세한 편이었다. 술집으로는 인사동 사천집, 이모집, 돈암동에 석굴암 등이 있고 다방하면 안국동에 도라지 다방, 사르비아 다방이 주 무대였던 그 시절 나도 가끔 남편과 함께 술좌석에 참여할 수가 있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돌아가며 노래들이 나온다. 그 때 부르는 노래들의 십팔번은 김재규 선생의 '돌담길' 장상섭 선생은 '검은장갑', 하인두 선생은 '연분홍 치마' 그리고 어김없이 강국진 선생은 음이 고르지 못한(음치)대로 열심히 '동그라미를 그리려다......' 하는 '얼굴'을 부르고, 차례가 갈 것 같으면 쑥스러워 하면서도 열심히 부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부인 황양자는 그 슬프디 슬픈 '들국화'를 불러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던 기억들이 난다. 또 그들은 동물, 특히 개를 좋아하는데 85년도인가 우리 집에서 가져 간 강아지는 지금도 자식처럼 키우고 있다. 잠도 함께 자고 일거일동을 거의 함께 하다시피 한단다. 강국진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보리'(강아지 이름)는 며칠을 음식도 먹지 않고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더란다.

하인두 선생이 세상을 떠낫을 때는 물론 그 뒤에도 여러 행사를 치렀는데, 특히 삼 년이 되는 해엔 '하인두 그림비'를 세우기 위해 추진위원으로서 그 모임의 번거롭고 궂은 일을 하였던 그에게 빚을 많이 졌었는데, 난 지금껏 그를 위해 아무일도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미안하기 짝이 없다. 자식하나 없이 그 넓은 집을 부인 혼자 '보리'를 의지하며 사는 것을 생각하면 난 글너데로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싶다.

남편없는 그 빈 공간이 얼마나 크고 소중하였던가를,, 살면서 뼛속 깊이 스며오는 아픔을 누가 알겠는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들..., 막막하기만 한 앞날들이 잠시도 마음을 편하게 하지를 못한다. 그 때마다 두 부부는 내 아픔을 달래 주었고 용기도 주었다. 아마 그의 부음을 듣고 앞이 캄캄해 졌던 것도 그를 크게 의지하였던 탓이었던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인간에의 애정과 신뢰도가 깊었던 강국진! 나이 50을 훨씬 넘었어도 늘 소년처럼 수줍고 순박하던 그가 친구로서 내 주변에 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제 10월 24일에 11월 6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그의 추모전을 열게 되었다. 부인 황양자는 초산부의 해산 만큼이나 망설임과 설렘과 불안을 안고, 남다를 진통을 견디며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남다른 감회로서 이 추모전을 지켜보며, 그 부인의 애틋한 그리움은 갈수록 짙고 한으로 맺혀 온갖 상념들이 승화되어 남편 강국진이 못다한 삷과 예술을 부인 황양자가 자신의 그림속에 쏟아 넣어 그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그의 그림 세계가 날개를 펴고 신명나게 펼쳐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1995.7

Yearning for Kang

강국진 선생을 그리며 (1995)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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