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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gyu Choi (painter)

 

 

It’s been three years since Teacher passed away.As time was nearing his end, I was having a bad dream.All of a sudden, I receive an obituary notice. We gathered to visit the mortuary at the ‘medical center’.I fuzzily loom into the scene where I am standing in Moran park in front of a bare tomb, watching the sky deforming and distorting its shape rapidly. I wake up feeling bizarrely confused.It was only days before when we students met up with the Teacher at 사루비아 coffee place in Insadong. He was there to invest us with ideas for strengthening alumni association, talking to us solemnly, but with real courage. I shook out of a large void and almost thought that the notice was just preposterous.

 

He is one teacher who truly made me immerse myself into the realm of art and understand the importance and profundity of it. He also encouraged his students to buck the trend and pursue freedom of expression and thinking. The road to a true artist was to interpret society with our unique philosophy and embody spirit of the times. And he taught us all these in his robust conviction that compromising with the secularity was no option for us to take.

 

For me, the precious 4 years studying under the Professor was all about asking fundamental questions about ingrained meaning of an artist. He never made his decisions rashly and in a hurry, as the early sages appropriately taught ‘not to be excessive nor come short’. He refused to be or have anything rooted in pointless formality, offering drinks out of his love towards his students, the kind of scene that somberly reminds us of today’s campus where there are no teachers truly worthy of the title and no students like real students.

 

Sir, you are never alone in your new place in heaven. We remember what you taught us and those teachings will be embodied so that your spirit lives on this dry land, and we are always with you every step of the way. Your students are tacitly doing their part out there. Be rest in peace.

 

 

 

5th July 1995Yangja Hwang, Kukjin Kang (Printpia: Seoul, Korea, 1995, p. 294)

 

 

Memoirs

김 선(화가)

 

사람이 살면서 자신이 진정 존경하고 삶의 지표가 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사실 쉽지가 않다. 역사상으로 훌륭한 사람이 많아 그들의 삶을 글을 통해 알고 난 후 존경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이 진정 존경하는 사람과 같이 호흡하고 얘기를 나누며 살 때 그 삶은 고맙고 감사하며 자신이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강국진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은 나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된다. 어쩌면 오늘날 내가 화가이며 대학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 그분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그분이 나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주었다거나 현재 나의 입장에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그분은 단지 나의 옆에서 묵묵히 당신의 예술과 삶을 살았을 뿐이고 나는 그 점을 존경하여 그분을 배우고 있었을 따름이다. 아마도 강국진 스승을 아는 많은 분들은 자연 나를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20여년을 나는 그 분의 주위에서 그분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1971년 여름 여운 선배의 소개로 강국진 스승의 판화교실에서 일주일 가량의 판화 수업을 듣는 기회가 있었다. 판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표현매체가 나의 관심을 끌었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선배들과 함께 한다는 그 분위기도 나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 당시 같이 배운 사람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여운 선배, 대학원 생인 김미화, 김봉진 등 한 10여명이 공부한 것으로 기억된다. 강의하신 분은 김상유, 강국진, 김구림 정찬승님들 등이었다. 강의 내용은 에칭과 실크스크린을 중점으로 하였다. 여기서 그 당시 우리나라의 판화현실을 잠시 언급해 보고자 한다 물론 나는 미술사를 전공하는 입장이 아니다. 다만 일찍이 판화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스승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본다.

1970년대 한국 판화의 현실을 지금과 비교해 보면 그 주변 요건이 매우 어려웠다. 판화를 한다는 자체가 이상할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대학에서의 판화 강의도 4년 동안 한 학기 정도며 그 내용 및 시설이 매우 엉성하였다. 그리고 판화를 제대로 강의 할 강사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런 어려운 환경은 1980년대 초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그 당시 판화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사명감 없이는 힘든 일이었다. 기법도 주로 실크스크린을 많이 이용하였다. 왜냐하면 산업사회에서 광고의 수단으로 실크스크린 기법을 많이 이용하였으므로 그나마 재료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제판기법이 쉬운 목판이었고 에칭이나 석판은 작업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워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던 때였다.

판화는 그 특성상 완벽한 재료에 의존도가 매우 높은 기법이다. 판, 잉크, 종이, 도구 등이 완벽히 준비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표현하기가 매우 힘든 장르에 속한다. 그 당시 우리는 판화, 특히 에칭이나 석판을 하기 위한 전문적인 재료는 전혀 국내 생산이 되지 않고(현재도 마찬가지지만) 수입 또한 불가능한 입장이고, 더구나 일반 화방에서도 판화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재료를 전혀 준비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화공 약품집이나 청계천주위의 인쇄소, 또는 철공소등에서 비슷한 재료를 구입해 작업을 해야 하는 딱한 입장이었다. 어떻게 수소문하여 에칭용 전문 잉크라든가 판화용 종이를 구입하면 아까워 쓰질 못해 나중에 잉크가 굳어 써 보지도 못하는 웃지 못할 경우도 생기곤 했다. 판화용 도구 또한 뿐만 아니라 찍는 프레스도 직접 만들어야 했다.

강스승 역시 직접 제작한 에칭 프레스로 작업을 하였고, 드라이 포인트, 니들, 스크레퍼, 버니셔등도 철공소에서 만들어 판을 제작하였다. 현재 판화 작업환경으로 볼 때 그 당시의 환경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그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판화를 보급하려는 몇몇 분의 노력이 현재 한국 현대 판화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강스승 위로 이 항성 님, 「이 상욱」님과 오직 에칭만을 작업하시는 김상유님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지만 판화의 대중적 보급을 위해서는 강스승과 그분 주위의 김구림 , 서승원님 등 여러분이었다고 할 것이다.

나는 일주일의 강습 기간이 끝난 후에도 강스승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로 매일 작업실에 나가 시키지도 않은 청소도 하고 나의 작업도 하였다. 말이 없으신 분이셨고 내 입장에서 보면 매우 어려운 분인데 허락 없이 매일 나간 나의 행동이 어쩌면 무모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아마 이것이 운명인가보다. 그런 생활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그분도 작업실을 나에게 맡기고 일을 보셨고 또 작업을 하실 때 내가 조수가 되어 도와 드리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선배 분들이 그 작업실에 찾아와서 때론 술을 마시고 때론 예술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할 때는 꼭 나를 그 선배들에게 인사시켜 주었으며 더구나 그 자리에 함께 하도록 배려하신 덕에 나는 학교 동료들 보다 선배 분들을 더 많이 알고 지낸 학창시절이 되었다. 기억나는 선배분들 중 돌아가신 박길웅님, 정찬승님 , 방송국에 근무하신 오명환님 , 아마 지금쯤 더불어 모여 하늘나라의 예술에 대해 논하며 계시리라. 그리고 현재까지도 매우 가까이 지내는 김한님, 최태신님, 한영섭님 , 여운님등 여러분들이 계신다.

강스승은 나에게 작품에 대한 말씀을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느꼈다고 본다. 사실 작품에 대한 말보다는 등산얘기며 여행얘기를 더 많이 했다. 그리고 같이 많은 곳을 다녔다. 그러던 중 그분의 삶을 이해하고 예술을 알게 됐으며 알게 모르게 그 분의 영향을 받고 이제까지 살아 온 것이다. 나는 자신있게 말한다 "나는 그분의 모든 것을 존경한다. 그리고 존경하는 분이 있었다는 그 사실에 매우 감사한다."

강스승은 세 번의 판화 개인전을 하셨다. 1975년 그로리치화랑에서 메조틴트 기법의 전시회와 1978년 한국화랑에서의 석판화 개인전 1987년 우정미술관에서 석판화 개인전 이다메조틴트 기법은 동판화 중 매우 까다롭고 힘이 드는 기법이기 때문에 아직도 몇 몇만이 이 기법의 작품을 하고 있으며 판화를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도 사실 기피하는 기법이라 하겠다. 이런 어려운 기법의 판화전을 하신 것을 보면 끈질기고 모험심이 가득한 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분의 예술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항상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그에 대해 과감히 도전을 하였다. 여러차례의 해프닝, 설치 미술, 또한 판화 등‥‥‥

-삶에서도 험한 등산과 엄청난 스피드를 즐기는 스키를 좋아한 것을 보면 분명 모험심이 많은 성격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사실 나도 등산과 스키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라 자연 같이하는 시간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 그로리치 화랑의 개인전 때 그림의 주제는 밤 바닷가 섬 풍경이 주종이었다. 메조틴트의 특성상 어두운 표현이 적합하여 밤을 택했다고도 보나 그 당시 그 분의 작품 성향과는 달리 매우 서정성 높은 그림들이라고 기억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재료 구입의 어려움으로 기법의 완벽함을 보여 주지 못한 점이다.

두 번째 한국화랑의 개인전은 다색을 이용한 석판화 기법으로 꽃과, 여자, 누드가 등장하고 장식성이 강한 작품 이였으나 충분치 못한 재료의 사용으로 다색 석판화의 맛만 보여준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 전람회였으며, 그 후 우정 미술관에서의 <빛의 흐름> 이란 시리즈작품으로 석판화의 발전된 면모를 보인 전람회로 이어졌다.

세 번의 개인전을 통해 보면 편안한 그림을 소재로 택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 분은 판화와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을 한 전시회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 당시 일반인들 뿐 만 아니라 화랑에서조차 판화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결과는 별로 만족 할 만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판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매우 선구적인 활동을 하였다. 판화 강의는 물론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창립하는데 힘을 합해 현재 한국의 판화발전에 기틀이 되었다는데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말이 없을 것이다. 한데 1990년대 초반 무슨 이유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이제는 판화를 하지 않겠다' 고 흘깃 말씀을 한 것이 기억난다.
1980년대 말 '한국현대판화가협회'전에도 참여치 않겠다고 한 후 얼마 기간이 지났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상황으로 개인적인 판화작업 여건이 (좁은 작업실) 매우 어려워지고 당시의 판화현실에 불만이 있었지 않았나 한다.
돌아가신 후 강스승의 작품을 정리하면서 느낀 점은 찍은 그림 위에다 약간의 드로잉을 가미한 말년의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교과서적인 판화에서는 한 발 벗어난 입장이라 생각된다.
강국진 스승을 생각할 때 '서울 방법전'을 빼놓을 수 가 없다. 1977년 '서울 11인의 방법전'이란 이름으로 시작하여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전시회에는 그 분의 정신이 배어있다.

처음 시작은 강국진, 김선, 김정수,김용철, 김한, 김홍주, 성능경, 신학철, 이건용, 황효창등 1 1인이 모여 미술회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한 사람은 사정이 있어 그림을 내지 않았다. ) 전시의 성격은 어떤 단체의 결성이 아니라 그때 그때 좋은 작가들을 모아 발표를 한다는 구속력이 전혀 없는 모임이었다. 그리고 이름에서 보여지듯 다양한 방법의 작품들을 보여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허나 그 당시 미술계의 전반적인 흐름은 특정 학교출신의 작가들 만이 모여서 세력의 확장을 위해 단체를 만들어 마치 그들 만이 한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양하던 어처구니없는 시기였다. 그래서 '방법전'에서는 소외된 작가, 특히 지방에서 활동하여 서울에 발표 할 장(場)이 없는 작가들, 또한 특정학교 출신이 아닌 작가들을 위한 단체로 그 성격을 규정 지어가고 있었다. 또한 강스승은 개인의 힘으로 일본 및 파리에 우리의 미술을 소개하였으며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는 교류전도 열었고 국내의 많은 작가들이 해외에 나가 견문을 넓히는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한국현대미술사에 제대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물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시작하신 일은 아니지만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밖에서의 노력인 관계로 조명되지 않았다는 점으로 돌리기에는 무언가 안타깝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많은 작가들 중 초창기 에는 '방법전'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고 그것이 발판이 되어 오늘에 이른 작가들도 꽤 많이 있다. 그들이 이 방법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스승과 그 당시 같이 한 여러 선배들은 매우 보람을 느끼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정신을 이어 받아 "서울 방법 작가회의"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든든히 이어가고 있다 우리들은 그 정신을 더욱 살려 소외되고 있는 훌륭한 작가들의 발표의 장(場)이 되도록 노력 할 것이다.

삼 년이 지났다 나는 몇 몇 분과 함께 강스승의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요즈음 나는 그분의 돌아가심이 느껴지질 않는다. 나날을 스승님의 작품과 글 속에 있으니 같이 있는 느낌이다. 숨결이 들린다. 체취가 느껴진다. 다만 같이 소주 한 잔을 나누지 못할 뿐이다. '돌아간지 세돌 강국진 그림잔치'를 끝 낸 후 스승님과 같이 올랐던 지리산 칠선계곡 길을 혼자서 걸어보아야겠다. 아니 스승님과 같이 한번 더 가야겠다.

Looking back at Teacher Kang (1995)

강국진 스승님을 돌아보며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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