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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boo Lee (poet)

 

 

After a lapse of 13 years since Kukjin Kang’s end, I realize that the time passes fleetingly as the life itself is of vanity. His posthumous exhibitions were held on the 3-year mark since he passed away, providing us with an opportunity to re-illuminate his achievement; ‘Exhibition of those who pay tribute to Kukjin Kang’ at Moran park gallery; the other one ‘the 3rd anniversary exhibition in memory of Kukjin Kang’ in Hangaram Arts Museum.

 

I still hold a question: what was the implication of Kang’s death amid the traditional art world faced with the incoming wave of new western art conventions, modes, techniques and history? I still wonder about the exact answer, but I can definitely see the void he left empty, reminding people of a corner of today’s art world once filled with the art of a hopeful and authentic artist. Now the new ‘Online Kukjin Kang Gallery’, permanently established for everyone to relish.

 

The completion of the online gallery was a fine move to make; it can get closer to the audience in general, even the novices, by being met with the advent of internet era. Not only that, people detected significant turning points as there were certain demands for information to write or study about Kang’s lifetime endeavor. The timing of its opening couldn’t have been better, and bore a lot of meanings, thanks to his hardworking widow Hwang.

 

My first encounter of him goes back to the mid-70s. The country went through various forms of oppression and censorship that everybody was looking like quiet fish lot in a barrel. Young people laid bare preposterous comments on drinking tables. I remember there was a rice wine place called ‘Eaksae’ where men of letters, culture and art frequented to dwell on two things; alcohol and grievance. I happened to live close to the place, and I was more or less a regular customer. There were always a few familiar faces including Kukjin Kang who was warm and kind, but almost overly quiet. He was called bear, or rock because of his natural mien.

 

There were other lot who I saw often; Junsang Yoo, the late Chanseung Jung and Myunghyun Oh, Han Kim, Taeshin Choi, Kulin Kim, Un Yeo and so on. I got to know a bit about Kang’s art from them. Perhaps the most memorable achievement of Kang for me was his establishment of ‘Noncol Art’ and the country’s first coterie magazine after graduating from Hongik University. I also knew that he was dedicated to put different forms on trial, always ahead in thinking and up to the challenge. Take for example ‘Chungnyun jakka yeunlipjun’ (Exhibition of young artist’s union) in 1967 and his experiments on happening, 3-D, installation and print works. Knowing about his artist life was an opportunity for me to ascertain about the other side of his nature, another aspect of Kang that fascinated me.

 

In the late 1970s, he changed his residence to a place near my house in Sungsandong. His new place was to be used for both studio purposes and household. There were always sophisticated printing instruments and machines breathing in his studio, and he sometimes gazed upon the scene out through the window with his pipes. Kang and I were friends of Han Kim, Un Yeo and Sanguk Kwak (owner of the pub, ‘Eaksae’) who played soccer at six in the morning. I, one of the founding members, persuaded him to join. He was a clumsy player, sometimes struggling a little. But we were all happy to feel detoxified after a game, only to get intoxicated again.

 

In the 80s, Kang was immersed into rhythm series, making numerous numbers of short lines to fill up a canvas. His studio at that time had a lot of pictures, enabling me ? or now the audience ? to expand the capacity of imagination by allude certain shapes to the beholder, such as mountain, tree, hill etc.

 

Kang left Sungsandong for Hanam’s Kumdan Mountain area in the mid 80s. He planned and arranged a newly built white house on a hillock with his and his wife’s personal studios. The place was the birthplace of ‘The Glow of History’ series.When I think of him, the fable of ‘hare and tortoise’ occurs to me, with the former being the world and the latter being Kang. He was always slowly progressing to achieving his ideal by pursuing what he wanted tacitly, and never made decision indiscreetly. A big passion was hidden behind the veil of taciturnity.

 

I could see the above in his pieces; the reckless routines of trials, experiments and thinking. New challenge is inversive, and avant-garde cannot be accepted to a fixed idea. But history tells us that it was these new challenges that made us evolve, and evolution of art contributed hugely to it. The latest version of Kang’s footmark on the history is this online gallery.

 

 

 

* ‘Eaksae’ : a dialect of ‘Uksae’ translated into ‘pampas grass’

Memoirs

이성부(시인)

 

깅국진 형이 뜻밖에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13년이 흘렀다.
놀라고 비통하고 안타까운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에서, 새삼 삶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형이 우리들 곁을 떠난 지 3년 만에 형의 무덤이 있는 모란공원 미술관에서 ’강국진을 기리는 사람들의 그림잔치’ 가 열렸고, 그 해 가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돌아간지 세돌 강국진 그림잔치’ 가 열려, 현의 예술세계를 다시 조명해 보는 기회가 있었다.

한국의 현대미술이 전통과 서구 미술사의 유입으로 온갖 다양한 실험과 기법에 만개해 있을 때, 강국진 형의 죽음은 과연 어떤 손실을 남겼는가. 나로서는 그것이 늘 궁금했지만, 형이 떠나버린 자리의 공허함, 믿음직스러운 한 예술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세월이 흐를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아픔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간 지금, 국내에선 처음으로 ‘강국진 온라인 갤러리’ 가 개설되어 상설 유작전이 열리게 된다.

인터넷시대에 대처하는 새로운 행보이자,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일반 대중이 어느 때고 손쉽게 검색,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미술계의 경사라 아니할 수 없다. 강형이 타계한 이후 지금까지도 후학들이 논문을 쓰거나 연구 활동을 위해, 자료와 작품 열람을 유족에게 희망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이 일은 분명 시기 적절하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일련의 일들은 평소 강국진 형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형의 미망인인 서양화가 황양자 여사의 눈물겨운 노력에 의해 결실되었다는 점을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내가 강형을 처음 만난 것이 1970년 중반의 일이다. 나라는 온통 유신독재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마다 움츠리거나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쉽게 속에 있는 생각들을 감추는 그러한 시절 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술집에 모여들어 막걸리나 소주에 취해 허튼 소리들만 일삼았다. 신촌 기차정거장 부근에 ‘으악새’ 라는 막걸리 집이 있었다. 두부 두루치기라는 안주 하나를 놓고, 막걸리를 퍼 마시며, 예술과 인생을 떠들어 대는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많이 드나들던 주점이었다. 나는 집이 모래내였으므로, 거의 날마다 퇴근길에 이 집을 들러가곤 하였다. 혼자였든 동료 또는 글 쓰는 친구들과 함께였든, '으악새'에 들어서면 언제나 한 두 명씩 또는 서 너 명씩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들과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섞여 막걸리를 마시곤 하였다. 그 무렵 미술을 하는 친구들 가운데 강형이 있었다. 언제나 말수가 적고, 듬직하고, 넉넉한 모습 이였다.

다른 친구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도, 강형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거나, 짧은 한두 마디로 응수를 하거나 하면서, 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편이었다. 이런 풍모 때문에 강형에게는 바위덩이 같다, 곰같다라는 별칭이 붙어 다니곤 하였다.

이 무렵 함께 자주 만났던 이들이 미술 쪽에서는 유준상, 정찬승 (작고), 김한, 오명현(작고), 최태신, 김구림, 여운 씨 등이었다. 나는 이들을 통해 강형의 작품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강형이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65년 ‘논꼴’ 동인을 창립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동인지 『논꼴아트』를 창립전 카다로그를 겸해서 창간했다는 점,--이어지게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을 창설하여, 또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몇 차례 해프닝(행위예술)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다는 점, 1970년대 초부터 입체작업, 설치미술, 판화작업 등에 몰두해 왔다는 점 등이었다. 이 같은 일련의 작업을 종합해 볼 때, 강형의 작가의식은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시대정신의 반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렇게 조용하고 무겁고 의연한 사람의 내면에는 활화산 같은 치열한 작가정신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나는 거듭 확인해 온 셈이었다.

1970년대 말쯤이었을까, 강형은 나의 집이 있는 성산동으로 이사를 왔다. 부인 황여사와 함께 차린 화실 겸 살림집이었다. 강형의 작업실에는 복잡한 판화 도구들이 항상 숨을 쉬고 있었고, 그는 파이프담배를 문채 지긋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 무렵 성산동에는 강형 외에도 김한, 여운, 곽상욱(으악새 주인)씨 등이 한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는 새벽마다 모여 달리기와 공차기를 했었다. 새벽 6시에 시작되는 성산조기축구회의 창립멤버였던 내가 그들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공을 쫓는 강형의 모습은 약간 육중한 체구에 굼뜬 동작이었으나, 매우 열심히 뛰어다녔다. 유니폼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린 강형은, 빙그레 웃으면서 ‘잘 안 되는군’ 할 때가 적지 않았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나면 어젯밤 마셨던 주독이 다 빠져 나간다며 우리는 유쾌해했고, 일요일 같은 때에는 운동이 끝난 뒤에 해장술로 하루를 보내기도 했었다.

1980년대에 강형은 <가락>(리듬) 시리즈에 매달렸는데, 나는 그의 작업실에 들를 때마다 방안 가득하게 널려진 캔버스에서 그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세로로 약간 가늘게 토막을 내어 선들을 긋는 되풀이를 통해서, 화면 가득하게 채워지는 아름다운 리듬을 느낄 수가 있었다. 노랑, 빨강, 파랑, 갈색 등 거의 모든 색을 다루면서 가득 채워진 평면들은 때로 배경에 어렴풋이 산이나 나무 언덕 들을 암시해 줌으로써,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주는 작품들이었다.

1980년대 중반, 강형은 성산동을 떠나 하남의 검단산 아래로 옮겨 갔다. 말로만 듣던 ‘언덕 위의 하얀집’을 지어, 누가 보기에도 행복하고 쾌적한 공간을 만들었다. 이 집에는 부인 황양자 여사의 작업장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이 집에 몇차례 가 보았는데, 이 집에서 검단산 산행의 들머리로 삼은 적도 있었고, 산행 후 이 집으로 내려오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아름답고 부러운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 강형은 <리듬> 이후의 <역사의 빛> 시리즈를 태동시켰다.

강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항상 ‘거북이와 토끼’의 우화가 떠오른다. 강형을 거북이에 비유하고, 오늘을 사는 대개의 사람들을 토끼로 빗대어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성급하게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어떤 일이든 쉽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 버린다. 쉽게 덤벼들었다가 쉽게 중도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세태 속에서 강형의 인간상은 유별나게 의연하고도 담담한 것이었다. 느리게 가면서도 쉬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꾸준히 갔다. 쉽게 생각하지 않았고 쉽게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류가 가는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일은 더군다나 하지 않았다. 과묵함과 침착함 속의 내면에는 누구 못지않은 열정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것을 그의 작품과 작업에서 보았다. 강형이 60년대 이후부터 타계할 때까지 보여준 논꼴 동인 활동, 해프닝, 입체, 판화작업과 <리듬>연작, <역사의 빛>연작들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치열한 실험정신 때문이었다. 실험은 언제나 전위적인 것이고, 전위는 고착화된 눈으로 보기에는 항상 불온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불온과 전위와 실험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 온 것이고, 예술은 시대마다 새로운 창조에 기여해 오지 않았는가. ‘강국진 온라인 갤러리’의 개설을 맞아 우리 미술계가 강국진 형의 예술을 더욱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라고 생각한다.

An artist of the immortalized fame

길이 남을 작가의 이름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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