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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길웅이 불혹의 나이를 못 넘기고 쓰러졌을 때, 빈소에서의 온갖 뒷바라지에 강국진의 자상한 보살핌이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연전 하인두의 사거에 임해서도 그는 발분의 친밀한 정념을 쏟았다. 그러던 강국진도 종래는 어이없이 불시에 그의 동료들 곁을 떠나고 말았다.
60년대 중반에 ‘논꼴’ 동인전으로 출발한 이 화가는 그 변신의 폭이 크고 넓다. 첨단적인 ‘해프닝’을 위시하여 ‘오브제’작업에도 관여했고 많은 부분을 판화에 할애한 판화가이기도 하다. 작품에 일관성이 없다는 평가도 내려졌을 만큼 영역을 다재 다기하게 두루 섭렵하고 있다. 우직스럽게 일에 열중함에 비추어 거기에 준하는 화려한 보상은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10번 이상이나 개인전을 치른 강국진의 작품세계는 여러 갈래의 기조로 나눠지기도 한다. 최종적으로 ‘역사의 빛’이라는 테마로 모아진 작품은 긋는 행위의 반복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그림들이다. 거기에는 짙은 선조성이 깔려 있다. 중첩된 선이 화면의 모노크롬을 덮기도 하고 분할된 색면 사이도 도식적인 기하학 형태가 얹혀지기도 하고 불상이라든지 새나 산, 나무 같은 유기적인 사물의 대상형태가 암시적으로나 은유적으로 배치되기도 한다. 서로 이완되는 듯한 결코 조화된다고는 볼 수 없는 색면 들로 불쑥불쑥 화면을 재단하고도 있다. ‘역사의 빛’은 ‘가락’시리즈에 이어 나온 발상이다.
개념성에 치우치기도 했던 강국진의 작품적 변모는 여러 차례의 실험적 시도를 거듭하면서 의외의 방향으로 진척 되어져 왔다. 적어도 작품세계에 관한 한 그는 떠돌이 화가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인간 강국진은 큰 변화 없이 자기 자리를 지켜 온 화가이다. 우직한 성품과 더불어 바위처럼 단단한 용모가 말해주듯이 그는 흔들림이 없다. ‘의리의 사나이’이기도 하다.
한 때 여러 국제전에 참여했을 만큼 다채로운 화력을 지니고 있으나 특정집단에 묶이기를 거부했던 그는 항상 외톨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동료와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신뢰감을 바탕으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했던 그의 주변에는 각계 각층의 문화인사들이 들끓었다. 그이만큼 교류의 범위가 넓었던 화가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강국진은 화가로서의 출범 초에 파격이라고 할만한 전위적인 작업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었다. 저 60년대 말의 암울한 시기에 말이다. 70년대 초에 가졌던 첫 개인전도 그 연장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는 그 이래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오면서 주기적으로 개인전을 통해 그것을 우리들에게 확인시켰던 것이다.
강국진의 작품적 연혁을 돌이켜 보면 딱히 무엇이라 꼬집어 지적할 수 있는 양식적 핵심 같은 것이 작품에서 집혀지지 않는다. 어느 지점에서 시작되고 어느 지점에서 끝났는지도 확실치 않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부분이 많다. 근작의 ‘역사의 빛’시리즈만 하더라도 딱 부러지게 해석할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든 불가해한 요소들로 둘러쳐져 있는 것이다.
정작 장본인인 화가는 그런 점에 별반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남이야 어떻게 보건 자기방식대로 하고 싶다는 식이다. 그처럼 일견 무신경한 것 같은 점이 이 화가에게는 장점인지도 모른다. 설령 그의 작품이 개념성에 치우쳐 있는 듯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는 그 사실을 논리적으로 구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그림은 어쩌면 논리가 증발된 어설픈 모양새를 갖춘 미완의 형상이었다고나 할 까.
화가의 죽음도 그렇듯 어설프게 맞이하고 불가사의하게 몰 한 격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맞은 임종이다. 주의의 동료친지들이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는 경황없는 사이를 두고 그는 병실에서 혼자 그의 작품생애를 마감했다. 결코 치밀한 죽음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나그네의 떠남과 같은 기분으로, 그는 허무한 미소를 머금고 갔을 것이다. 삼가 고인의 영전에 명복을 빈다.

작가발굴4 / 강국진 '역사의 빛' *

미술세계   1992. 06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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