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 Publication
지난해 10월 24일.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는 이색 대형전시가 하나 열렸었다. 이미 작고한 한 화가의 전생애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의 유별난 의미는 이미 지상에는 없는 한 화가를 기리는 사람들 60명(선후배 화가, 친구, 제자 등 그이를 기억하고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과 그이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한 여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전시회를 기획했다는 데 있었다. 그들이 함께, 그이의 작품 세계와 생애를 정리하는 320쪽짜리 도록을 만들고, 작품을 끌어 모아 그이의 작고 세 돌을 맞아 마련한 것이었다.
그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미 지상을 떠난 지 3년이나 된 그이를 이토록 간절히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또 누구들인가.
그이는 바로 ‘비운의 화가’. ‘실험정신 가득한 예술가’로 세인들에 추억되곤 하는 고 강국진화백이다. 그리고 그이의 작품들을 모아 전시장에 내걸었던 60명의 사람들은 ‘강국진화백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과, 그이가 떠난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 언덕 위 하얀 2층집을 여태까지 지키고 있는 부인 황양자(서양화가)씨다.
지난 늦가을, 바람결에 들려온 그이의 유작전 소식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예술가의 흔적을 더듬는 취재는 언제나 무거운 부담감으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한 사람의 삶과 예술혼이 만들어낸 그 깊은 자국을 어떤 방식으로 훑어나갈 것인가… 는 때로 고민스러움의 도를 지나쳐 밤잠을 설치게 하고 밥맛조차 잃어버리게 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이의 모든 생애를 통틀어서, 이를테면 태생이나 수학기, 습작기, 활동기 등의 전시기를 통틀어 단 한번도 그이를 직접 접하지 못했던 경우라면 더더욱 가슴이 타는 것이다.
화가 강국진. 그이를 나는 어떻게 만나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은 꿈결에서조차 생각나곤 하는, 내내 떨쳐버릴 수 없는 오래된 숙제중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지난해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바람결에 문득 그이의 유작전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후 일간지 문화면 마다 에는 이 전시회를 성사시킨 ‘강국진화백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이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모임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그이의 부인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소개가 되곤 했다.
드디어 오래된 숙제를 끝내야 할 시간이 닥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취재계획을 세웠다. 나름대로는 주도면밀 하다 싶은 그런 계획을 짰다. 황양자씨로부터 강국진화백에 대한 모든 자료를 입수할 것. 그녀와 하룻밤을 지새우며 매스컴에 노출 안된 모든 사적인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정리해볼 것. 생전의 그와 절친했던 화우, 선배, 제자, 친구였던 이들에게서 그이의 성품, 세계관, 작품관, 인생관 등에 대해 폭넓게 탐문해 볼 것… 등등.
이 중에서 제일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은 물론, 이 지상에서 그이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부인 황양자씨 일 수밖에 없었다.
1층에는 남편이 2층에는 아내가 그림을 그리던 언덕 위 하얀집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 279-2번지. 동네 좌우로 길게 퍼져있는 살림집들의 오른편 끄트머리쯤, 마을과 뒷산이 연결되는 약간 높은 지대, 그러니까 마을 아랫쪽과 마을 앞 저 앞들까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이곳에는 유별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흔해 보이지도 않는 그런 하얀 이층집이 서있다. 바로 이곳에 4년 전 뇌졸증으로 갑작스럽게 남편 강국진 화백을 저 세상으로 보낸 황양자씨가 이 집의 나이와 똑 같은 11년생 보리(85년에 하인두 선생 집에서 가져온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늘 상 그녀 발꿈치를 쫄랑쫄랑 따라 다니는 이 누렁이한테 쏟는 그녀의 마음이 각별해 보인다. 우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검은 눈망울을 꿈뻑거리는 보리에게로 향했다.
“그이 있을 때는 보리 성격이 이러지 않았는데, 나하고 단 둘이서만 살다 보니 성격이 변한 것 같아요. 얼굴 모르는 사람이 오면 괜히 큰소리로 짖고 으르렁거리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보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안쓰러움이 가득하다. 사람의 온기가 적은 데서는 짐승들도 빨리 늙는다면서.
유난히도 정이 많았던 강국진은 이 작은 짐승에게도 유독 사랑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이가 영영 저 세상 사람이 되었던 날, 한갓 미물일 뿐인 이 개도 주인의 죽음을 눈치챘던지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시선은 마치 “강국진은 지금 잠깐 외출하고 없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한 실내 풍경으로 맞춰졌다. 아무렇게나 걸려져 있는 그이의 옷가지. 물감 자욱이 남아있는 채로 탁자 위에 놓여진 화구들, 뒷산을 산책할 때 썼을 법한 모자며 장갑 따위들, 그리고 4년 전 까지만 해도 그이의 손길을 탔을 것들임에 분명해 보이는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뜻밖이었다. 그것들은 주인을 잃은 유품으로 거기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 주인님은 지금 밖에 나가셨어요. 잠깐만 기다리시면 돌아오실 거에요. 그러니 여기 앉아 주인님이 그리다 만 그림을 감상하실래요? 그러면 곧 저 현관문을 열고 우리 주인이 빙긋이 웃으며 들어오실테니까요.” 그것들마저도 아직, 주인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이 아름다운 집에는 4년 전 까지만 해도 1층에 내려다보고 올려다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는데, 그들 부부는 1층과 2층에서 음악을 공유하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작업을 했었다고 한다.
그이 곁에는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이 내외가 그림방이 곁들여진 이 자그마한 이층집을 지은 것은 1984년이었다. 강국진이 직접 설계하고 온갖 잡일을 도맡은 까닭에 그이는 유독 이 집에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그렇담 그이는 무슨 생각으로 이 외딴 곳에 집을 지었던 것일까. 11년 전만 해도 이곳은 오지나 다름없는 깜깜 시골이었다고 한다.
서울 깍쟁이들이 대부분이었던 지인들의 걱정은 또 얼마나 대단했던가. 남들은 이고지고 서울로 올라오는 판에 오히려 시골로 내려가다니…하는 걱정 반 한숨 반의 염려가 대부분이었다. 그때 그이들의 하남행을 달가워한 사람은 주변에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것이라는 게 황양자씨의 말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걱정을 뒤로 하고 온 하남에서의 생활은 얼마나 따뜻했던지. 생전에 그이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최태신씨(목원대 교수)는 “강선생 집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젊었을 때도 그랬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그이 집은 언제나 우리들의 사랑방이었다.”고 얘기해 주었다. 서울에서나 하남에서나 그이의 주변이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것은 남의 얘기를 경청해주곤 하던 다정다감하고 너그러운 그이의 성품과 무관하지 않다.
그이와 함께 <한강변의 타살>(68년 10월. 문명비판, 현실비판을 주제로 강국진, 정찬승, 정강자 등이 제 1한강교 밑에서 했던 행위미술)을 함께 펼쳐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던 정강자씨(서양화가)는 그이의 푸근한 성품을 이렇게 회고한다. “형은 참 이상한 사람이다. 일주일 만에 만나건 10년 만에 만나건 언제나 늘 같이 있어온 오빠처럼, 남편처럼 편안하고 정겹다. 말수가 적은 형은 표정도 별로 없어 그저 소리 없이 씩 웃는 것이 고작인데도 형과 같이 있으면 왜 그리도 재미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형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나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언제나 형의 주위에는 후학들과 친구들로 벅적거렸으니까…”
행위미술이 정신병자 취급 받던 시절
강국진이 정찬승, 정강자 등과 함께 당시로서는 쇼킹할 만한 행위미술에 심취해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했다. 급진적 실험정신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미술이란 그저 벽에 걸어둔 오래된 그림 한 장으로 이해되던 때였다.
그래도 그들은 주눅들지 않았다. 인사동 사천집과 이모집, 돈암동의 석굴암과 같은 술집들과 안국동의 도라지나 사루비아 같은 다방들로 몰려다니며, 차를 마시고, 술을 삼켰으며, 노래를 불렀다. 강국진이 즐겨 불렀던 노래는 “동그라미 그리려다…”로 시작되는 노래였는데,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하도 열심히 불러 그의 노래는 “감동스럽기조차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후 명동에 ‘스페이스 디자이너’라는 실내 인테리어 사무실을 꾸려 생활을 꾸려나간 4년 동안(1968-1871)에도 그이의 일터에는 그가 관계했던 ‘논꼴동인’, ‘신전동인’, ‘무동인’등의 젊은 예술가들의 발길이 잦았다.
또한 이후 그이가 마포구 합정동에 우리나라 최초로 판화공방을 열었을 때도 사람들은 여전히 우르르 몰려와 커피와 술을 마셨다. 그때 그이가 끓여준 라면의 맛은 정말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 시절 대부분의 젊은 예술가들이 가난했던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커피와 술과 라면과 함께 오갔던 그 숱한 얘기들과 사람들과의 따듯한 교우를 사람들은 잊을 수 없는 것일 터이다. 그리워한 까닭이다.
말하기 보단 들어주기를 좋아했던 그이
그러다가 1975년 그이는 그림공부를 하던 황양자씨를 만나 하인두 선생의 주례로 신촌의 로터리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른다. 너그러움과 편안함으로 후배들의 다정한 오빠이자 형이었던 그이가 이제 비로소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위치를 지니게 된 것이었다.
“그이는 빈 깡통 하나도 버리는 법이 없는 성격이었다. 나는 원래가 게으르고 치밀하지 못해 엄벙덤벙 대충대충 하는 편인데, 그이는 내가 흘리고 다니는 것을 챙겨줄 정도로 꼼꼼했다. 이 집 지을 때, 사흘 동안 끙끙대면서 강아지 집을 짓길래, 당신 같은 고급인력이 이런 단순노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시장에 가서 하나 사버리면 될 것을 뭐하려고 이렇게 고생고생하며 만드냐고 했더니,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씩 웃으셨다. 그러더니 사흘 만에 그럴싸한 개집을 만들어놓았다.”
결혼 후 강국진은 지어미에겐 그지없는 남편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지난해 11월, 유작전을 앞두고 펴낸 도록에는 그이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쓴 황양자씨의 절절한 사부곡이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당신을 앞에 두고 나는 끝없이 많은 말을 하였죠, 아주 가끔 말대답을 하면서 조용히 들어주시던 당신의 모습이 마치 천년을 가도 움직이지 않을 바위와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여보야 화 안나?” 하고 물으면 “애들 데리고 어른이 화내니?”하셨어요. 당신에게 나는 늘 어린애였죠. 한 번도 의젓한 부인이 되어드리지 못했고, 또 좋은 부인도 아니었습니다.
그이의 과묵한 성격은 지금도 늘 화우들의 입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기도 한다.
그이의 절친한 친구였던 김한씨(화가)는 그이의 이런 과묵함에 대해, 그이 생전에,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1978 화랑, 19호에서)
어쩌다 내게 무료한 시간이 있어서 그의 집에 가보면 그는 항상 무언가를 만지고 있다. 그는 경상도 사람답게 과묵하고 우직스럽고 비타협적이며 또한 고집불통이다. 이러한 기질이 그를 항상 무엇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고 또한 무언가를 해야만 하게 하는가 보다. 그의 작업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느라면 흡사 시지프스를 대하는 착각에 젖는다. 그가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바위같이 앉아서 뻐끔뻐끔 연기를 내 뿜고 있을 땐, 저게 도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는 말이 없고 느림보며 어떻게 보면 미욱하기 이를 데 없다. 허나 그의 그 끄떡도 않는 부동의 자세에서 그의 모든 것이 있는 것이고 그의 말없는 행동에서 신뢰감과 함께 묘한 매력을 풍기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이의 붓끝
그러나 지금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토록 다정다감했던 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는 남의 얘기를 경청해주곤 하던 이, 누구에게든지 선뜻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곤 하던 이… 그 정 많던 강국진은 어느 날 갑자기, 저승으로 갈 짐 꾸릴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황망히 사람들 곁을 떠났다. 진보적 실험정신으로 가득했던 젊은 날의 객기와 예술정신이 캔버스 위에서 한껏 무르익었다가, 드디어는 새로운 자유를 얻으려는 참이었는데, 그 순간에 그이는 간 것이다.
그이의 마지막 작품들을 보면, 그이는 마치 죽음을 보면, 그이는 마치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기조차 하다. 한껏 무르익은 작품성과 붓터치 하나에서 느껴지는 그 무한한 자유… 대성한 화가들의 말기 작품에서 느껴지는 활달함과 자유스러움이 화폭 가득 담겨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이를 아는 사람들은 특히나 이런 단계(이제 막 최상의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 시기)에서의 그이의 죽음에 더더욱 애달퍼지곤 했으리라. 건강검진 한번 받아보겠다고 입원해 오일째 되던 날, 퇴원 소식 대신 전해 받은 부음은 그들 모두를 깊은 슬픔 속으로 몰아넣었지 않은가.
그렇게 그이가 가고 난 삼 년 동안, 많은 이들이 그이의 집을 스치면서도 “우리들만 살아있는 게 미안해서, 살아남은 우리들 보고 눈물 뽑을 부인 보기가 민망해” 그이 집을 선뜻 들어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 눈물 많고 여린 심성의 부인 황양자 씨가 먼저 그이의 유품들을 채이고 1천여점 되는 유작들을 모아 전시회와 도록 발간의 뜻을 비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녀의 이런 사연은 아름다운 ‘사후내조’의 한 전형으로 매스컴에 보도 되기도 했다.
나는 황양자씨와 함께 이 지상에 그이가 남겨놓고 간 작품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무수한 점으로 빼곡히 채워진 가락시리즈, 그리고 화면의 대칭적 구도를 구사한 역사의 흐름 시리즈 등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와 나는 마치 오래 된 친구처럼 작품 속에 서있었고, 어느 결엔가 우리 곁에는 그이 강국진이 다가와 소리 없이 웃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들-화가 강국진(1938-1992), 아직도 살아있는 그이의 실험정신
금호문화 1996. 02
KUKJIN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