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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하는 젊은 미술>, 동아일보, 1967.12.23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을 보고

근 몇 년동안 조직적이요 집단적인 젊은 세대의 발언이 전혀 없었던 우리나라 화단은 이를테면 자식도 없이 지레 갱년기에 들어선 조로병환자나 다를 바가 없었다. 대를 이을 새 세대와 단절된 채 시들어가는 권위에만 집착하고 있은 우리화단의 생리, 이를 뒤집어 말하면 그것은 무기력한 패배주의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 기성의 권위는 젊은세대의 발언에 애써 귀를 막으려하거나 아니면 그 진정한 가치를 부정하려들기가 일쑤인 것이다. 그 어떤 새로운 일을 꾸미는 데에는 용기라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에 자리를 같이한「한국청년작가연립전」의 동인이 바로 그 용기를 가졌다. 그것은「행동하는 미술가」를 표방하여 그들의 창작행위의 연장으로서 그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해서 뿐만은 아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여태껏 생각되어온 미술 그 자체에 대해 도전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다분히 쇼적인 요소가 깔린 이 연립전은 그 명칭이 가리키듯 세 개의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고 이들 그룹은 그마다의 독특한 양식을 들고나오고 있다. 「오리진」동인들은 한동안 우리나라 전위미술을 휩쓴「앵포르멜」의 감정과잉과 과격하게 맞서고 있다. 어쩌면 귀족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의 작품은 캔버스라는 미디엄에 고집하면서 회화작품의 평면성을 절제있게 고수하고 있다. 평면성은 장식성으로 통한다. 그리고 장식성이란 우리의 시각을 가장 명쾌하게 자극시켜주는 미술작품의 기본적인 요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피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장식성의 정형화인 것이다.
「무동인」그룹은 이와같은 너무나도 순수조형적인 그들의 동료들의 관심사를 숫제 외면하고 있다. 「반=예슐」의 색채가 짙은 이들은 조형의 문제보다는 생활의 재발견 내지는 현실의 권리복귀라는 과제를 내세우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일상적인 것이기에 자칫 우리의 눈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리는 오브제를 새로운 경이의 대상이 되게하고 차원을 달리하는「생」을 누리게 만든다.
한편 똑같이「생활하는 생활속의 예술」을 지향하면서도 「신동인」들은 선배인 「무동인」과 「오리진」이 내세우고 있는 세계를 동시에 작품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소재를 일상생활속에서 취하고 있기는 하되, 작품을「조형적」으로 실현하려는 의욕에 크게 뒷받침되고 있으며 그것을 작품이 놓인 환경과의 연관속에 설정하려 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간은 벌써 작품속에서만 작용하기를 그친다.
이 일 (미술평론가)

생활하는 젊은 미술

동아일보 1967.12.23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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