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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회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조선일보, 1968.6.2

(박스) 현대회화를 어떻게 볼것인가 - 청년작가연립회 세미나르서
극을 가는 해프닝 쇼
○ 풍선에 묻힌 팬티 바람 - 한아름씩 될만한 빨간 고무풍선이 10개쯤 떠있고 청년들은 거기다 투명한 「모던풍선」들을 자꾸 만들어 붙였다. 이윽고 내복차림의 여인(화가 정강자)이 나와 의자에 앉고 청년들은 그의 어깨에, 팔에, 가슴에, 배에, 투명한 풍선들을 만들어 붙인다.

작업 도중에 여인의 러닝샤쓰는 칼로 째여 벗겨지고 상반신이 드러나며 또 아래 내의도 벗기어진다. 팬티 하나만 입은 여인의 온몸에 투명한 풍선들이
계속 붙여진다.
여인의 온몸은 커다란 비누방울속에 묻혀가는것처럼 투명한 풍선(플라스틱)속에 잠겨간다. 존 케이시 등의 현대음악이 흐르고 청, 적, 황색의 조명들이 간단없이 비쳐진다.
30일 오후 6시부터 서울 서린동 소재 「세시봉」음악감상실에서 한국청년작가연립회가 연 제4회 현대미술세미나르 중의 해프닝 쇼(Happening Show)의 「투명풍선과 누드」.
환경미술의 공동실험으로서 1시간 30분간 진행된 이 제작에는 청년작가연립회원뿐 아니라 관람자들도 함께 참가했다. 마침내 반나체의 여인이 일어서고 제작자들은 여인의 몸을 감싼 투명풍선을 눌러 부수는 것으로 제작은 끝나며 여인은 퇴장하고 작품은 없어진다.
해프닝 쇼에 이어 유준상씨(미술평론가 서라벌예대 강사)의 강연「현대회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질의응답을 통해 현대미술에 대한 문제들이 얘기되었다. 질의응답에는 시인 구중서씨, 화가 정찬승(주최자)씨들이 참가했다.
오늘의 미술이라면 크게 ①특히 미국에서 널리 퍼진 포프, 오프 아트 ②멕시코, 남미등에서의 지역성을 내세우는 미술 ③공산권의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특히 현대미술로서의 문제성을 지닌 것은 추상 이후 앙포르메, 액션 페인팅등을 그쳐 포프, 오프 아트 이후에 이르는 구미 자유주의 세계의 미술이다.
흔히들 『나는 대학을 나오고 지식인으로 자처 하는데 전람회에 가보면 도무지 요즘 그림들은 알수 없다』는 말들을 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의『모르겠다』는 것은 이미 마음 속에 그가 가진 기정적인 틀(그림은 이런것이라는 지식)에 그 그림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논리적(오성적)인 일종의 선입견이다.
미술작품은 그런 오성보다도 감성으로 감수해야 한다. 현대 회화를 보는데 가장 긴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작품을 대 해야한다는 것이다. 허심탄회한 마음 속에 그림을 오성이 아닌 감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 작품을 보는 감성은 점점 세련되어간다.
회화에는 ①사실화 ②구상화(반추상) ③추상화 등이 있다. 사실화는 사과를 눈에 보이는 사과 그대로 그린다. 구상화는 사실화 아닌, 칸딘스키의 말을 따르면 『사상의 구체적인 실체를 부여하는 행위』로서의 구상을 말한다.
구상화에서는 화제(畵題)가 「토끼」라도 토끼로 안보이는 그림이 그려질 경우가 있다. 토끼의 형태는 화가의 감정에 따라 변모도 되고 해체도 된다. 토끼를 주제로 해 화가에게서 떠오른 갖가지 상상력이 화면에 재현된다.
추상화는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그것을 주제로한 감정이 아니라 화가가 순수한 자기 감정을 그리는 것이다. 몽드리앙의 그림은 선, 색, 면을 가지고 작가가 상상하는 순전한 자기의 감정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추상작가들은 그런 감정세계의 표현을 위해 화면에 날카로운 선을 긋거나, 물감을 마구 뿌리거나 단조로운 색만을 칠하기도 한다.
현대의 미국 사회같은 데서는 도식적인 기계화와 대중 문화속에서 개인이 빛을 잃는다.
이같은 인간 소외 속에서 인간을 되찾으려는 부르짖음(사회 현상에 대한 감정적 도전)이 액션페인팅이나, 포프아트나, 마침내 오늘 이 자리에서 본 것같은 해프닝같은 순간적인 미술 행위로 나타난다. 해프닝의 순간적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행위만 있고」이미 예술은 없어졌다는 생각을 하게도 한다.
한편 기하학적 추상충동(피타고라스의 정리도 한 추상충동에 의한 것이다)을 미의 극치로 추구해가려는 것이 기하학적 추상으로서의 오프아트다.

 

현대회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조선일보  1968.06.02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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