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ub Han (painter)
It has been my long-term habit to gaze upon the Jungbu Highway, and it started as I moved to Kwangju, Kyunggido. It augments my volition and desire for harder living; looking at fast-moving vehicles, stream of cars moving up north to Seoul in Sunday afternoons. The meaning of seeing all this is reminder of my position away from the main stage of survival and liveliness.
There is another point of reference along the highway that I found since converting an old house into an art studio to commence on my life as an artist 10 years ago. A white painted house with red roof located in a valley east of toll gate point. The late Kukjin Kang’s old place reminds me of my own inadvertence and yearning for Kang.
Affinity.
We could still smell the tear gas from the 4.19 Revolution on our first meeting as we commenced on our university career in March 1961. My friendship was somewhat shallow during our first two years as we both chose to concentrate on what we did. It was as we reached our third year in the university that people started calling him ‘brother Kang’, a comprehensible alias concerning his big brother-like aura.
“Bro, how about a drink?” I ask as I expect his consensus in low-toned voice. He got along well with people, and led people around them with his typical charisma, even with undesirable events occurring.
It was my aspiration at the time nearing my graduation to find the meaning of walking the road to becoming an artist, just as much as others such as the deceased Chanseung Jung, Taeshin Choi, Inhwan Kim. The contemplation arose within us as we considered forming a group with others like Kang himself, Chulmo Yang and Younghee Nam who joined us belatedly, ultimately forming ‘Noncol’. Later we published the country’s first literary coterie magazine and opened the first ‘Noncol Coterie Exhibition’. Considering back the Noncol art, Myunghee Han, wife of Inhwan Kim puts it:
“As I returned from my summer holiday to Jeju Island, Noncol had included overall seven members. The new members were each unique in their own rights: one was a bigheaded guy who made the most out of his wide range of knowledge from extensive reading and style (Chulmo Yang); another was happily admitted to join on the unanimous decision owing to his total commonness in outlook, the tacit and resonant one (Kukjin Kang); and the other is the cute, tricky little lady who used bring sweet potatoes upon her visits during our first season (Younghee Nam).
The group of seven was formed. The morale was high. You can gauge the gravitas of the coterie by checking the list of participants; Kyungsung Lee, Seobo Park, Junsang Lee, Dongli Lee, Duksu Mun and Kwangsu Oh, who each contributed a literary gem. And this is accompanied by a grandiloquent proclamation in the prelude of the book:
‘Proclamation’
We together hold high our flag of freedom against any antiestablishment and compromise
1. The formative condition shall be predicated upon our ‘consciousness within freedom’ into our new world
2. We hold as our philosophical ethics the creative change of time in radicalism
3. We pursue formative morale having set our foot on the platform of intellectuality out of indiscreet emotional resources of the established.
That was the grand inception, and our group was dissolute after three exhibitions ? the first two in Seoul and the last held in Busan. My tie with Kang remained concrete after the dissolution. The first time I came to serious terms with Kang was the time that I opened private art classes in Gyedong, Jongnogu in my effort to become independent from parents. He remained close to me and my workplace even for the next two classes I opened in Huamdong and Myungryundong. Plus, at the time, it was only natural to go through a series of obstacles and serious life discussions, while one imagines there are episodes and other small bits of history that went unknown to everyone else.
‘Gyedong class rat incident’, ‘Yangpyung antique incident’, ‘Ism incident’, ‘the second daughter of the mill shop’ ‘Dongdaemun Middle School recommendation incident’ etc.
These times were important for both of us because we were starting to construct our own ideals and identities with the most innocent version of our minds.
We were then faced with reality of how the society operated, either according the collective ideals or aid unbalancedness. We didn’t know where we were heading to, having chosen our own paths. Our values changed and didn’t seem to fit either to the society or to each other’s. I didn’t see him much from the on. Then along came our second major get-together, ultimately forming ‘Muhandae Hyupwhae’ (‘Infinity’ Society). The group was collection of people with recalcitrant minds against the established ones, while exerting an immense force of cohesion ? being indisputably the most active of its kind in terms of exhibition efforts, but ending its career with 4th exhibition as their last public display. Members were myself, Boonghyun Choi, Taehyun Lee, Chanseung Jung, Taeshin Choi, Myochun Lee, Jungsu Kim, Changun Jun, Kidong Kim and Kang Bro. Kang and I were involved in an unsavory scandal, rendering our relationship fragile.
To briefly account for the scandal, it happened in a cafeteria at Yonsei University in Shinchon. Kang and I were there to represent ‘Muhandae society’. I witnessed the ugliest side of Korean art world and the established system of dark operation, so bad that I will forever remember it as a major coup likely to claim its spot in an unauthorized chronicle of history. The aftermath of the tragedy was me watching Kang working lively with his broad social basis and financial cushions.
My third meeting with him, as I have in mind, would be my condolences and sending of my heart towards him in heaven. Those fellows who stayed ever so close, seungjo Lee, Chanseung Jung, Myunghyun Oh, Kunil Kim, and Kang Bro. Dear Brother.
I no longer have anyone truthful around me. The irony of fate does not prove false once again. I remember your bit in the storyline. Our passion, companionship, values and patterns of our lives, I only wish that we talked in faithful spirit.
There shakes a Dangui flower ever so peacefully. It feels just like you. And beyond the flower I see the highway with cars whizzing by, and rain dripping from the eaves, reminding more of you. I am sorry!
Yangja Hwang, Kukjin Kang (Printpia: Seoul, Korea, 1995, pp. 284-285)
Memoirs
한영섭 (화가)
오래 전부터 나에겐 중부고속도로를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경기도 광주로 이사 온 이후이다. 창 밖으로 멀리 내려다 보이는 중부고속도로, 쏜살같이 달리는 자동차들, 정지된 채 사이렌 소리가 요란한 일요일 오후 상경 길,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며 가끔은 삶의 의욕을 느끼곤 한다. 저 길, 저 도로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나에게 잠시나마 서울이라는 생존의 장에서부터 이탈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0여 년 전 여기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에 있던 옛 집을 화실로 개조하여 작품 생활을 하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부고속도로를 수 없이 오갈 때마다 무의식 중에 시선이 멈춰지는 그 자리. 그 곳은 톨게이트 동쪽에 위치한 산곡 마을, 붉은 기와에 하얀 집, 이제 고인이 된 강형의 손 때가 묻고 숨쉬던 그 곳이다. 항상 이 곳을 지나칠 때마다 무심한 나의 마음을 느끼며 강형에 대한 아쉬움과 번민이 가슴에 가득해져 온다.
강형과의 인연.
우리는 4.19학생의거에 의해 최루탄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 1961년 3월 입학과 함께 만났다. 4년간의 학창생활 중 I~2년은, 서로가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 일에만 충실했던 시기였고 3학년 어느날 부터 인가 그는 강형이라 불려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에게 풍기는 큰 형의 느낌이었으며 또한 애칭으로 동창 남녀는 물론 선후배들까지도 강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형! 오늘 막걸리 한 잔 어때" 하면 그의 특유한 저 깊은 몸 속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신음소리와 같이 "음"하며 주위와 어울려졌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수용하고 묵인하며 절제와 인내로서 주위를 이끌었던 것이 학창시절 그의 참 모습이었다.
졸업 무렵 그러니까 1964년 11월경 대학 생활을 마감할 시기에 홍제동 도로 가에 모여 작품에 열중하던 '정찬승'(얼마 전 고인이 됨)을 비롯해 '최태신', '김인환' 그리고 나는 졸업을 앞두고 화가의 길에 의미를 같이 찾으려 했다. 뒤늦게 '강국진' , '양철모' , 그리고 '남영희'가 동참하게 되었고 그 이름을 '논꼴'로 정하게 되었다. 이들 7인이 모여 제1회 '논꼴 동인전'을 개최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지를 출간하게 되었고 그 『논꼴아트』중에 강형과의 결속을 '한명희'(김인환의 처)씨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64년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제주도 여행을 다녀 온 뒤로 반년 간 (논꼴)의 식구는 일곱으로 불게 되었다. 그 하나는 멋과 다독의 미 체계화된 박식을 곧잘 유용(?)하는 떠버리 크레이(양)이요, 둘째는 작품관의 상통으로 만장일치에 의해서 입회된 묵지근 하면서 뒷북을 울려주는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 (강)이고, 셋째는 '논꼴' 1호 아뜨리에 시절부터 고구마를 사 들고 종종 내방했던 필연적인 논꼴 아가씨-고집 세고 깍쟁이인 홍일점(남)이었다.
이렇게 만난 7인, 이 때의 '논꼴' 동인들의 기상과 패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때 『논꼴 아트』에 원고를 쓰신 분들을 열거만 해도 우리들의 둥지가 어떠했나를 가름할 수 있다. '이경성' 선생님을 비롯해 '박서보' , '유준상' , '김동리' , '문덕수' , 그리고 '오광수' 선생님의 주옥 같은 글들이었으며 책 서두에 우리들은 거창한 선언문을 기록하였다.
여기 그 선언문을 기록하여 본다.
선언문
일체의 타협과 형식을 벗어나는 시점에서 우리는 항시 자유로운 조형의 기치를 올린다.
1. 새 시대에 참여하는 '자유에의 의식'을 우리의 조형 조건으로 한다.
2. 우리는 극단적 시간의 창조적 변화를 조형의 윤리로 삼는다.
3. 기성의 무분별한 감성에서 벗어 나 지성의 발판에서 형성의 모럴을 추구한다.
우리는 이렇게 모였고 1, 2회전은 서울에서 3회전은 부산에서 개최 이후 자연 해체되었다. 이 후 강형과의 인연은 더욱 밀접한 관계 속에 지속되고 있었다. 처음 강형과의 밀접한 만남은 내가 졸업과 동시에 가정에서부터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으로 종로구 계동에 미술학원을 차리면서부터 이다. 그 후 후암동 화실, 명륜동 화실까지 강형과의 동거가 이어졌으며 서로는 분신처럼 가까이에 그가 존재했다. 이 만남에는 즐거움과 어려움과 괴로움이 같이했다. 어떤 때는 며칠 몇날을 같이 굶기도 하고, 밤 새워 가며 인생을 논할 때도 있었고 창작의 길, 혹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둘이는 동거동락을 했다. 둘만이 간직한 사건들은 아직도 둘만의 비밀로 간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계동화실의 쥐 사건, 양평의 골동품 사건, 시즘 사건, 방앗간 둘째 딸 사건, 동대문 중학교 추천 사건 등…
이 시기에 강형과 나에겐 자아를 형성하고 가치관을 정립해 가는 시기였으며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이어진 귀중한 시간들이었다.
그 후 서로는 조금씩 안정되어 졌으며 각기 자기의 길을 선택하여 사회라는 커다란 집단 속에서 서로를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다. 개인보다는 사회, 사회보다는 현실이 서로의 가치를 달리했던 시기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뜸하게 만났다. 몇 년 후 우리는 '무한대 협회'를 결속하면서 필연적으로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되었다. 이 '무한대 협회'는 그 시대 화단에 강렬한 반발력에 의해서 그 응집력을 발휘했던 집단이었으며 회원들의 개성들이 대단했다. (전시 중 가장 많은 주량을 과시했었으며 4회를 끝으로 그 생명을 다했음) 회원으로는 강형을 비롯해서 최붕현, 이태현, 정찬승, 최태신, 이묘춘, 김정수, 전창운, 김기동 그리고 본인이었다. 그 '무한대 협회'가 해체하기 직전 강형과 나는 어떤 사건에 휘말려 서로가 무심한 관계가 된 후 우리들은 형식적인 만남만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이 사건의 무대는 신촌 연대 입구 어느 식당에서였다. 강형과 나는 무한대 협회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일어난 한국 화단의 단면은 나의 머리에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야사에서나 기록될 불발 쿠데타였다. 그 후 강형은 비교적 윤택한 생활 속에서 그의 보스적 기질과 사회적 기반을 발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나의 눈에 비추어 지곤 했다.
이제 세 번째 만남은 그를 그리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된 그를 향하는 마음일 것이다. 유독 내가 가까이 있었으며 아꼈던 화우와 동창들, 이승조, 정찬승, 오명현, 김건일, 그리고 강형.강형!
소중한 시간과 마음을 같이했던 오랜 친구들. 이젠 내 주위에 아무도 없구려. 누가 인간사를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습니까. 강형과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필연적으로 맺어졌던 젊음의 의욕과 투혼, 서로의 생활 패턴, 가치관의 차이가 우리를 갈라 놓았소.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다 먼저 떠나 버린 강형과 한번쯤 진솔하게 서로를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한스럽소.
창 밖에는 풍요로우면서도 소박한 흰 당귀 꽃이 비바람에 휘날리고 있소. 살아서의 강형 모습같이 느껴집니다.
그 꽃 너머로 중부고속도로 차 소리가 더욱 요란히 들리며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는 더욱 강형을 생각하게 합니다. 강형! 미안하오.
On the highway (1995)
고속도로 선상에서 (1995)
KUKJIN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