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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gyul Saebul (painter)
 

“It’s already been three years! The day was for remembrance of when the whole country cried out to stand up itself, at six in the morning, on March 1st.
You told me to take care of myself rather than worrying about your state, smiling all along.
I put you behind me to get to Daejun, and what the phone call told me was tragic!
We were going to go skiing on the 24th, you being a fan of sledding and snow. It came to me that I could not delay meeting you for some reason, and look what’s happened now! I turn away after a long night of chat and you were gone. How could this happen to me?”

 

This is the word of Taeshin Choi who were so faithful and affectionate to his loved friend who passed away. The Vice president Yookyung Lee of Chosun Daily, Dongji Lim of the Korean Culture and Arts Foundation, you and I got together once Spring and twice Summer of 1990 (4323 Tangun era), then forming ‘Murwa’ with more members. It was September 17th at Kang’s place.

 

It was at your place that us four, Jongjin Lee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vice president, Russian language teacher) and Sukhee Lee (editorialist of Kookje Daily News) mingled to enjoy Mrs. Hwang’s palatable food and drinks, wishing the group will last for a long time.

 

‘Murwa’ coming from ‘Murda’(tender) and ‘wa’ from ‘oda’(come) to make up ‘Murwa’ ? meaning things that are the most pliable of all things, the very existence that is in demand from all of the living. And we have gathered here to form a group to take exactly that role in life, as we have ripened enough and flaccid enough to help others in good faith and become just good friends ? as ‘wa’ denotes.

 

The monthly meeting was fun and joyful with Kang in lead, leaving us all the good memories and episodes. The group was further strengthened as Jungwi Kim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Arabic teacher), Myunghee Han (University of Seoul, Korean classical music teacher), Juno Lee (Soongsil University, French teacher) and Byunguk Seo (departmental chief of Chosun Weekly).

 

But you weren’t present at Jungwi Kim’s place for our meeting, as we tried to contact you in vain. Then the sad news came next morning. You felt the desperate need for the medical check-up, but never let us know as you knew we would worry.

 

We wailed over the tragedy, crying out loud you name, sometimes even in physical hardship. If the depth of sadness was that profound in us, then how could the state of Mrs. Hwang’s be? Her cry in sickness made us even more tearful as you were her right hand ever since the marriage.

 

She tried so hard to shed off the sadness for almost a year, later to look for your posthumous exhibition venues, but it was hard to get. But the effort paid off as Sangneung Kwon (managing director of Chosun gallery), Han Kim, Kijum sung, Yanggu Park, Soomgyul Saebul, Taeshin Choi, Minja Ryu, Yangja Hwang, Sun Kim, Hyeran Jung, Yongmo Kim, Changun Lee, Guisun Kim and many others including Kang’s students finally broke through to organize the exhibition at Hangaram Art Museum of Seoul Arts Center.

 

We’ve overall had three posthumous exhibitions, thanks to your friends’ hard work and effort to preserve. Last May, Han Kim, Youngsub Han, Kumnam Baek, Inha Lee, Yangja Hwang, Sun Kim, Jongsun Lee, Yongmo Kim and Minwon Seo worked strenuously to select works from your 1,000 or so for catalogues, picture books and for photographs. During the process, we could only be amazed by not only the sheer number, but also your perseverance. Perhaps we could have seen more of these fabulousness if you were still here to fulfill even bigger picture as we expected. This is why your absence is felt in the heart of many people.

 

Last Spring, three years since your departure, graduates from Hansung University danced along a shaman ritual routine at your grave, performances and party on the garden of Moran Gallery, and exhibition of 23 artists to praise your virtue. ‘Murwa Moram’ could go down to Haenam because the widow’s older sister, her husband and elder brother invited us to be shown around the city on the last day of April. Juno Lee sent us wine from Paris to add to another joyful night among the friendship and love that you left us with.

Jongmu Park, our friend from the middle school, met with you and me during our university career, meaning the meeting was more than 30 years ago. The memory of living a tough students’ life, and straight out of rural area to survive hostility of Seoul never left my mind. We had to read and write at the same time. Park and you came along to my shabby house ? one that had vinyl patching all around ? near brooklet in Jungneung, and I gathered some greenstuff to make a full pot of barley stew. I cannot forget the time when we appease our hunger with the stew and rice wine.

 

You made some visits to my new home at Chungundong, later to new apartment at Hyunjeodong and Sakimakgoel place in Gwachun. As I come to realize now, it was your patience and generosity that made my immaturity and sternness acceptable, all the while sparing your words.

 

Your love that we remember is a spring that doesn’t dry up, and we could see the evidence from your wife’s graciousness and people’s endeavor to make your work come alive by showing it to the world. And this is just as ‘Mur’, ‘Mul’(water) represents exactly what you were known for. It seemed like we reached a deadlock, but we finally remembered your lesson and felt the revival of your teachings to make another meeting with you happen at the Hangaram Arts Museum, opening a new frontier.

 

Your works will always be seen around the country, and as we see the progress that Mrs. Hwang has been making, your beloved ones will not only remember, but also experience the resonance.

 

 

Yangja Hwang, Kukjin Kang (Printpia: Seoul, Korea, 1995, pp. 282-283)

Memoirs

벌써 세 해가 지났구려!
온 나라가 제 힘으로 일어서자고 외쳤던 그 날의 뜻을 되새기는 세째 달 하룻 날, 새벽 여섯 때.
"나는 괜찮으니 걱정말고 태신 네 몸 생각이나 하거라" 던 강국진의 웃음 띤 말을 뒤로 하고 한밭(대전)으로 내려 갔다가 날 벼락같은 번개말(전화)을 듣고 달려와 보니 그 새 숨을 거두고 말다니! 뫼 나들이를 좋아하고, 눈 썰매 지치기를 즐기던 국진이, 지난 달 스물 나흘에 함께 가기로 한, 눈 뫼 타기를 할 수 없게 됐다면서 다음에 만나자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찾아 올 것 없다던 말을 듣고도 굳이 찾아간 것이 지난 달 스물 나흐레 밤이었습니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곁에서 눈을 조금 붙힌 뒤 새벽 일찍 헤어져 집으로 가는 사이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 어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단 말입니까?

돌아가신 벗님의 죽음을 마냥 슬퍼하면서도 저승으로 잘 모실려고 밤낮으로 애쓰면서 두루 맡아 치러낸 최태신님의 이야기를 내 나름으로 적어 둔 것입니다. 조선일보의 이유경 부국장과 문예진흥원의 임동지 국장, 그리고 벗님과 나, 네 사람이 4323(1990)해 봄,여름 두차례 만나다가 '무르와'이름으로 그 뜻을 밝혀 첫 모임을 갖게 된 것은 그 해가 가을 아홉째 달 열이레, 강국진 벗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 언덕바지에 그림방을 곁들인 벗님의 집에서 우리 넷과 이종진(외대 부총장, 러시아말스승)님, 이 숙희(국제신문 논설위원)님이 어울려 벗님의 지어미 황양자님의 남다른 솜씨로 마련한 푸짐하고 맛깔스런 먹거리와 잘 익은 술맛을 즐기면서 '무르와'모임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라고 다짐했습니다.

'무르다'의 '무르'와 '오다'의 '와'를 아우른 '무르와' - 온갖 것 가운데서 가장 무르고 무른 '무르>물'은 모든 목숨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삶의 힘이 될 뿐 만 아니라,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살아가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고 있으니 우리 모람(모인 사람;회원)들이 저마다의 일을 해오면서 알맞게 영글어 때 맞춰 무르익어서 말랑 말랑 녹실 녹실하게 열린 몸가짐과 마음 씀씀이로 함께 어울려 벗하면서 '와'의 뜻처럼 가깝게모여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뜻을 펴면서 기꺼운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는데 있음을 밝힌 모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달 걸러 만나는 '무르와 모임'은 언제나 흐뭇한 자리를 만들게 되었고, 바깥 나들이를 할 때에는 어김없이 벗님이 앞장 서 이끌면서 여러가지로 즐거운 이야기 거리를 남기곤 채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의 살림을 맡고 있는 임동지님은 모든 일을 야무지게 꾸려나가는 데다 김정위 (외대, 아랍말 스승)님 , 한명희 (서울 시립대, 한소리 스승)님 , 이준오(숭실대, 프랑스 말 스승)님 , 서병욱(주간조선 부장)님이 새 모람으로 들어와서 모임이 한결 더 든든해 졌습니다.

김정위님 집에서 모이는 날, 빠진 적이 없던 벗 님이 보이지 않아 궁금한데다가 웬일인지 집으로도, 배움터로도 그 까닭을 알아볼 수 없었으므로 무척 걱정이 되었습니다. 무슨 엉뚱한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아침, 하늘이 무너지는 슬픈 일이 일어나다니! 벗 님은 우리 모임이 있던 그 무렵,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힘들게 느껴져서 몸이 어떤가를 살펴보느라고 국립의료원에 들어가 있으면서 우리들에게는 걱정 할까봐 알리지도 않았던 것임을 나중에사 알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벗님의 죽음 앞에선 많은 분들이 슬프고 안타까워 술로 낮과 밤을 잇고 더러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마시고는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벗님을 아끼는 이들의 아픔이 그러 할 진데 지아비를 잃은 지어미의 마음이야 오죽이나 사무쳤을까!

"집 안팍의 살림살이를 모두 챙기고 다 해 주기만 해서 아무 일도 손수 해 본 일이 없는데 혼자서 어떻게 살아 가느냐?" 고 목이 메어 울먹이던 황양자님의 모습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을 더욱 슬프고 안타깝게 할 따름이었습니다.

지아비의 사랑만 받다가 외톨이로 남은 외로움과 벗님이 남긴 그 많은 그림들을 어떻게 할지를 몰라 마음 앓이를 하면서 줄곧 눈물로 지새다가, 가까스로 지난 해부터 국립현대미술관과 호암갤러리를 찾아 다니면서 그림잔치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애를 써 보았으나 뜻을 이루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자리를 마련하게 되어 지난 해 열째 달 스무 여드레와 열한째 달 닷새 날에 권 상능(조선화랑 사장)님과 김한, 성기점, 박양구,숨결 새벌, 최태신, 류민자, 황양자, 김선, 정혜란, 김용모, 이창근, 김귀선님, 그 밖에도 한성대학에서 벗님의 가르침을 받은 여러 배움 아들, 딸들이 강국진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잔치 이름을 돌아간 지 세 돌, 강국진 그림잔치로 하고 벗님을 아끼던 많은 분들과 함께 힘을 모아 훌륭하게 치를 수 있도록 뜻을 모우게 된 것입니다. 지난 다섯째 달에는 김한, 한영섭, 백금남, 이인하, 황양자, 김선, 이종선, 김용모, 서민원님들과 함께 두차례에 걸쳐 벗님이 남긴 즈믄(1,000)에 가까운 그림들을 고르고 골라 그림잔치에 낼 것과 그림 죽보기 (화집)에 실릴 것들을 가려내어 빛박이 (사진촬영)를 하고 글을 쓰는 일들을 여러 사람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일 보다는 남의 일에 더 마음을 쓰고 새로운 일거리를 벌리기 좋아하던 벗님이 마음 따사로운 가르침을 쉬지 않으면서 그리고 만들어 낸, 그토록 많은 그림을 남긴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그림을 보여주고 더 많은 그림을 펼쳐 보일거라고 믿고 있던 우리의 믿음을 저버리고 일찍 저승으로 가버린것은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큰 것입니다.

지난 봄 벗님이 돌아간지 세 해째되는 셋째 달 하룻날에는 많은 분들이 모인 가운데 한성대를 나온 이들이 벗님의 무덤앞에서 넋을 달래는 굿거리 춤을 추고, 모란미술관 뜨락에서는 짓거리 잔치와 바깥 펼침잔치, 그리고 미술관에서는 스물 세사람의 그림으로 벗님을 기리는 그림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해남에서 을라오신 언니(처형), 그 지아비와 오라버님께서 불러주셔서 '무르와 모람' 들은 네째달 그믐날 내려가서 해남의 곳곳을 둘러보는 봄나들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준오님이 파리에서 마련 해 보내주신 포도술을 곁들여마시면서 벗 님이 지난날 그 곳을 오가면서 나누던 따뜻한 마음씨와 맛과 멋의 잔치에 벗님이 빠진 아쉬움을 안은 채 흠뻑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벗님은 갔어도 끈끈한 믿음으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그 먼 땅 끝까지 가서도 짙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온 배움터(중학교)의 벗 박종무랑 벗님을 큰 배움터(대학) 다닐 때 만났으니까 서른 해가 휠씬 더 지났습니다. 그 무렵만 하더라도 살기가 어려웠고, 시골에서 올라온 우리들은 입고 먹고 자고 공부하는 일들을 제 힘으로 풀어나가느라 무척이나 힘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정능의 개울가 낡은 집을 비닐로 둘러치고 그럭 저럭 버텨내고 있을 무렵에, 두 사람이 그곳 까지 찾아 왔을 때, 집 가까운 밭에서 푸성귀를 뜯어다가 한 솥 가득 끓인 보리죽과 막걸리로 배를 채우던 일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벗님은 내가 방을 빌려 새 살림을 차렸던 맑은 구름 골(청운동)과 서대문의 고개 밑 마을(현저동)에 마련한 다락집(아파트)으로, 과천의 사기막골 집으로 가끔씩 찾아오곤 했습니다.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종무 벗님과는 달리 말이 적었던 사나이 국진, 술 마시고 먹는 일에 부지런을 떨다가 드물게 한 마디씩 거들면서 어울리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의 만남 속에서 사귐의 긴 이랑을 일구어 온 것은 까탈스런 내 버릇조차 너그럽게 받아준 벗님의 넓은 가슴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지아비의 그림잔치를 마련하느라 마음을 태우면서 안간힘을 써온 벗님의 지어미를 돕고 있는 여러분들을 만나면서 함께 놀라워 하는 것은 벗님이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그대로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이어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맑게 흐르면서 움직이도록 하는 힘, 벗님은 바로 그 '무르', '물'이 되어 늘 우리와 함께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힘들이 두루 모아져서 벗님이 돌아가신지 세 돌을 맞이하여 드디어 '강국진 그림잔치' 를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게 한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쳐서도 굽히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도록 하고 새로운 만남으로 또 다른 힘을 얻으면서 만남의 기쁨을 키우고, 애쓰는 보람을 뿌듯하게 느끼게 했으니 고맙고 흐뭇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벗님의 그림을 미술관이나 또 다른곳 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아름다움은 우리들 마음속에 늘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벗님이 그토록 사랑하던 지어미가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뜻을 펴 힘껏 살아가면서 두 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더 많은 아름다운 일들을 새롭게 일구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좋은 지아비 강국진은 좋은 『무르와 모람』으로도 우리들 마음 안에 오래오래, 맑은 물이 흐르듯 함께 할 것입니다.

Murwa and Moram, Kukjin Kang (1995)

무르와 모람 강국진

KUKJI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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